[르포] 25년차 집배원 김계수씨의 하루… “손편지 보면 나도 기뻐요”
입력 2014-02-05 01:36
새해 덕담도 카카오톡으로 나누는 시대, 연말연시 서울의 우체통엔 어떤 사연이 들어 있을까. 우표 파는 곳도 찾기 힘든 세상에서 25년차 집배원 김계수(56)씨의 하루 32㎞를 동행했다. 그가 담당하는 우체통 27개에선 우편물 2000여통이 나왔다. 2011년까지 하루 두 번 우편물 수거하던 걸음이 지금은 한 번으로 줄었다. 하지만 우체통에서 ‘손편지’를 꺼내는 손길에는 더 많은 정성이 담긴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지난달 20일 오후 2시. 마포구에서만 25년 근무한 김씨가 우편물 수거에 나설 채비를 했다. 합정동 동교동 서교동 연남동 상암동 망원동이 그의 구역이다. 장비는 열쇠와 휴대용이동단말기(PDA). 열쇠 하나로 마포구 모든 우체통이 열리고, PDA로 각 우체통 바코드를 인식해 ‘출석체크’를 한다. 김씨는 노련하게 차를 몰아 골목 곳곳에 숨어 있는 우체통을 찾아냈다.
◇줄어드는 편지, 사라지는 우체통=홍대입구역 인근 54번 우체통을 여니 주인 잃은 지갑 두 개와 편지 6통이 나왔다. 요즘 우체통 속 손편지는 대부분 군부대로 향하는 ‘연애편지’다. 홍익대 부근 우체통 여러 곳에서 영어 스페인어 등 외국어가 적힌 엽서들도 눈에 띄었다. 이 동네에 많이 생긴 게스트하우스 관광객들이 쓴 것이다. 김씨는 “어떤 날은 국내 발송보다 해외 발송이 더 많다”고 했다.
합정역 인근 우체통을 열자 모양도 크기도 같은 편지 30∼40통이 쏟아졌다. 기업에서 보낸 대량 우편물이었다. 김씨는 “받는 사람이 별로 기뻐하지 않을 광고물이나 정(情)이 없는 업무용 우편물에는 가슴이 뛰지 않는다. 손으로 정성껏 쓴 편지봉투가 보이면 내가 받은 것처럼 기쁘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우편량은 2003년부터 감소세로 돌아서 매년 평균 1.5%씩 줄어들고 있다. 우체통을 거친 우편물은 8270만통(2008년)에서 3836만통으로, 우체통은 2만3761개(2008년)에서 1만9121개로 줄었다. 우체국 대청소와 일제정비를 하는 매년 4·5월이면 3개월간 수집물량이 없는 우체통들이 철거된다.
◇보이지 않는 우표=편지와 우체통이 점점 자취를 감추면서 우표도 사라지고 있다. 마진이 크지 않은 데다 찾는 사람이 줄어드니 파는 곳도 줄었다. 우표 발행량은 2억9614만장(2003년)에서 1억1687만장으로 감소했다.
이날 우표 대신 500원짜리 동전을 편지봉투 뒷면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인 편지가 나왔다. 김씨는 “그래도 이 사람은 양반”이라며 껄껄 웃었다. 우표를 둘러싼 꼼수도 많다. 한 번 사용했던 우표의 소인을 교묘히 가린 ‘재활용’ 편지, 척 봐도 기본 규격을 넘었는데 모르는 척 300원짜리 우표를 달랑 붙인 편지, 아예 우표가 뭔지 모른다는 듯 붙이지 않은 편지 등 ‘반칙’의 종류는 다양하다.
다분히 고의적인 편지는 ‘미납’으로 반송하지만 집배원이 남몰래 우표를 붙여주는 편지도 많다. 김씨는 “한두 번 하는 일도 아니고 봉투만 봐도 안다”며 “정성이 묻어 있는 편지는 우리가 우표를 붙여준다”고 말했다.
◇잃어버린 물건, 버려지는 양심=우체통에선 뜻밖의 물건이 나오기도 한다. 편지와 함께 실수로 넣은 신용카드나 돈, 주인 잃은 지갑과 휴대전화 등은 모두 집배원 손을 거쳐 주인에게 돌아간다. 이날도 10개 가까운 우체통에서 분실된 신용카드 등이 나왔다. 검정 매직으로 ‘분실물’이라고 적은 흰 종이에 정성스럽게 싼 휴대전화도 있었다.
오물은 악질 불청객이다. 휴지조각부터 먹다 버린 커피가 든 종이컵, 토사물이 든 봉지 등 종류도 다양하다. 구겨 넣은 담배꽁초 탓에 편지에 구멍이 나기도 한다. 훼손된 편지는 집배원이 직접 물수건으로 닦고 드라이기로 말려 복원한다. 김씨는 “정성과 마음이 담긴 편지가 몰상식한 사람들 때문에 누더기가 된 걸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마포우체국으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4시. “눈이 많이 왔는데 수집은 잘 했느냐”는 아내의 전화를 뒤로하고 김씨는 “편지가 수취인을 잘 찾아가려면 소인 작업을 해야 한다”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글·사진=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