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강은교] 문자메시지

입력 2014-02-05 01:33


언제부턴가 나도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받는 일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KTX를 타거나 고속버스를 타면 문자메시지에 매달린다. 비록 부산에서 대구까지 가야 문자메시지 하나를 전송할 만큼 자판 찍는 일에 서툴다고 해도. ‘어른한테 문자메시지라니!’ ‘문자메시지 때문에 국어가 다 파괴되고 있다’는 등의 걱정들은 철지난 외투가 되고 있다.

권력은 이제 문자메시지가 던지는 전자파에서, 아니 전자파가 던지는 문자메시지에서 생성된다. 우리가 선거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메시지가 선거한다. 문자메시지는 오늘의 경전이다. 오늘의 보이지 않는 도덕이다. 그 보이지 않는 전자파의 지붕 밑에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담보한다. 수천만원이 오가며 우정도 오가며 사랑도, 신념도, 이상도 오간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이렇게 소통이 잘되는, 얼굴을 볼 필요가 없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부담이 없어서 즐거운 시대가 있었을까. 누군가는 ‘단군 이래의 전 국민적 작문 시대’가 도래했다고, 오늘의 문자메시지 열풍을 표현하지만.

스마트폰은 오늘 권력의 대들보가 되었다. 그 대들보 아래서 소시민들은 서로가 연결되었음을 즐거워하곤 한다. 그 ‘연결’이 근대와 현대의 인간적인 것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연결이 아니라 개인 정보들도 기호화하는, 무서운 그런 연결임에도. 그것들에게선 인간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첨단의 무기로 치르곤 하는 오늘의 ‘전쟁’이 인터넷의 게임 스토리처럼 인간을 제쳐놓은 채 인간의 살육을 일으키듯이 개인의 극히 개인적인 정보들, 주민등록번호라든가, 경제활동들의 온갖 번호들이 스마트폰의 대들보와 문자메시지의 혈관 앞에서 몇 십원에 거래된다.

그 사건 하나로 전 국민이 ‘단군 이래의 소용돌이’ 속에 빠진다. 존재가치의 소용돌이이며 인간의 비인간적인 소용돌이. 카드 재발급을 받으면서 인간들은 자기가 그 번호의 의미만큼 축소되었음을 느껴야 한다. 나는 ‘주민등록번호가 아니요’ ‘계좌번호도 아니요’ ‘비밀번호는 더욱 아니요’라는 외침이 정말 이렇게 의미가 없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카드 재발급을 받으면서 나는 나의 번호를 쓴다. 어머니의 사망이 번호의 소멸로 비로소 사망이 되는 것을 경험했듯이, 나의 삶이 번호 속에서 비로소 기지개를 켬을 씁쓸하게 쳐다보는 것이다. 그래도 문자메시지로 즉시즉시 나의 삶을 볼 수 있으니 나는 좋은 시절에 살고 있는 행운아야, 라고 외치며.

강은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