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경래 (12) 광주민주화운동 후 강제 해직… 다시 주님의 길로

입력 2014-02-05 02:33


박정희 대통령의 임기를 3단계로 나눠 평가하고 싶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부터 65년 6월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기까지 1기 초창기다. 권력 수립기로 볼 수 있다. 한일협정 체결 후부터 육영수 여사가 피살된 74년 8월까지는 2기 중흥기다. 박 대통령은 해외 차관을 도입해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다. 이 시기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육 여사 피살 후 79년 10월까지는 3기 종말기다.

3기 박 대통령은 국정을 등한시했다. 관료들은 박 대통령에게 부정적 정보를 보고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눈은 점점 어두워졌다. 점점 침체기에 빠졌다. 시기별 공과가 있다. 딸 박근혜는 알려진 대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박 대통령은 75년 8월 나의 세 딸 원미 원주 원희가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국제기독교협의회(ICCC) 초청 연주 후 청와대로 우리 가족을 초대했다. 딸은 영부인을 대신해 동석했다.

나와 박 대통령의 서신왕래는 71년부터 약 8년 동안 이어졌다. 내가 받은 편지는 44통이다. 육 여사 서거를 기점으로 편지가 줄다 79년 초 끊기고 말았다. 박 대통령은 이후 나의 조언은 물론 누구의 말도 잘 듣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육 여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대통령으로서 박정희의 삶이 상당히 일그러졌다고 생각한다.

73년 편집국장을 마친 뒤 나는 문화방송·경향신문 연수실장 겸 기획실장을 거쳐 77년 부설 한국정경연구소 소장으로 일했다. 79년 10월 26일 18년여 동안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박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한 달여 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쿠데타 12·12사태가 일어났다. 80년 4월 5일 아침 보안사 요원 3명이 들이닥쳤다. 나는 서울 서빙고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대공분실은 간첩을 취재하는 곳이었다. “당신이 여기 왜 오게 됐는지 생각나는 대로 적으라.” 나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루 뒤 한 조사관이 말했다. “대구 강연에서 전두환 장군을 헐뜯지 않았소? 있는 대로 쓰는 게 신상에 좋을 거요.” 나는 그제야 그때 일을 더듬었다. 얼마 전 경북 지역 기독학생회 초청으로 강연에 나섰던 일이 있었다.

“신군부가 정권을 ‘장물’처럼 챙기려 하고 있다. 소방수는 불을 끈 뒤 소방서로 돌아가야 한다. 불 끈 공로가 있다고 해서 그 집에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웃긴 일이냐. 신군부가 정권을 찬탈하는 것은 더 큰 국가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나는 진술서를 작성했다. 옆방에서는 고문에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강제연행된 지 닷새 만에 풀려났다.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후 신군부는 언론 장악을 위해 문화방송·경향신문 사장을 전격 교체했다. 신임 이진희 사장은 간부를 포함해 124명을 해직했다. 나도 포함됐다. 7월 15일 30년 동안 몸담았던 언론인의 길을 마감했다. 전체 언론을 대상으로 한 강제 해직과 언론 통폐합의 본보기였다.

나는 갈 곳이 없어졌다. 친구들에게 전화하면 수화기 너머로 “없다고 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이 있고 힘이 있을 때는 사람들이 나를 찾았다. 일이 없어지자 사람들이 나를 피했다. 하나님 안에서 만났던 이원설 박정수 정광택 이동원 같은 친구들은 변치 않고 늘 따뜻하게 내 손을 잡아줬다. 여기저기 기도원을 찾아다녔다. 성경 66권을 제대로 읽었다. 석 달 정도 걸렸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