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유명가, 가평요-검은 달항아리와 그 이후’ 전시 준비하는 김시영씨 가족

입력 2014-02-04 02:32


“우리는 한국 흑유도기 전통 잇는 도예가족”

세 부녀는 설 연휴도 없이 작업에 몰두했다. 5일부터 17일까지 서울 을지로 롯데갤러리에서 여는 ‘흑유명가, 가평요-검은 달항아리와 그 이후’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유명로에 위치한 가평요의 주인 청곡(淸谷) 김시영(56)과 제자이자 두 딸인 자인(28), 경인(24). 20여 년간 한국 흑유도기(黑釉陶器)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도예가족이다.

흑갈색의 유약으로 빚어내는 흑유도기는 삼국시대부터 시작해 고려시대에 절정을 이뤘으나 조선 중기 이후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청자와 백자 가마터에서 부수적으로 구워져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다 현대도자의 유입과 검은색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일본에선 천목(天目)이라 불리며 여전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이어가고 있다.

잊혀져가던 전통 흑유를 계승·발전시켜나가고 있는 도예가 김시영은 원래 공학도였다. 연세대 금속공학과에 입학한 그가 흑유와 인연을 갖게 된 것은 산 때문이었다. “대학 산악부 동아리에서 1983년 알프스를 등반했는데 화전민 터를 지날 때 흑유 파편을 우연히 보게 됐어요. ‘도자기가 어떻게 까맣지?’하는 궁금증이 생기는 거예요. 이때부터 혼자 연구를 시작했어요.”

그는 대학 졸업 후 현대중공업에 입사했으나 얼마 안 가 그만두고 다시 연세대 산업대학원 세라믹공학과에 들어갔다. 흑유 재료를 본격적으로 실험·연구하기 위해서였다. 1991년 대학원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가평요를 차렸다. 흑유를 시작하고 10년간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가마에 불을 지폈다. 처음엔 실패를 거듭했다. 마음에 드는 색을 찾는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분청은 가마 온도가 1230도, 청자는 1270도, 흑유도기는 1300도에서 구워진다. 오랫동안 불 앞에 있다 보니 기도 점막이 모두 말라 무호흡증으로 생사를 오가기도 했다. “청자와 백자는 색의 차이가 크지 않지만 흑유의 색은 무궁무진해요. 불의 온도나 굽는 방식에 따라 매번 다른 색이 나옵니다. 삼라만상을 담고 있는 고색창연한 색이 탄생할 때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지요.”

숱한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결과 경기도가 한 분야의 최고 장인에게 수여하는 ‘경기으뜸이’(1999년)로 선정됐다. 한국을 찾는 해외 국가원수에게 그의 작품이 선물로 주어지고, 일본의 경매회사들이 참고하는 ‘일본구락부명감’에 그의 찻잔 하나가 100만엔(약 1000만원)에 책정되기도 했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그의 작품을 “검은 대지에 잔잔히 피어난 꽃들과 같다”고 평했다.

하지만 그의 갈 길은 여전히 멀고 험하다. 그 누구도 가치를 알아주지 못하고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두 딸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흑자(黑磁)의 맥을 이어나가겠다고 자청했다. 이화여대 조소과를 나와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 특별전에 참여한 큰딸 자인씨와 서울대 조소과에 재학 중인 작은딸 경인씨는 흑자의 빛깔을 연구하기로 마음먹고 번갈아가며 가마를 지키고 있다.

두 딸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배낭을 짊어지고 흙을 채취하러 가평의 이 산 저 산을 누볐다”며 “매일같이 불과 씨름한 아버지의 흑자는 삶의 집약”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는 아버지의 검은 달항아리와 생활도자기, 큰딸의 세련된 하이힐 모양 도자기, 작은딸의 앙증맞은 과일 모양 도자기 등 70여점이 나온다. 사람들이 좀 더 쉽게 흑자에 다가가도록 대중화한 작품들이다(02-726-4428).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