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런일이] 서울아산병원 전공의 성추행 사건
입력 2014-02-04 01:33
전공의 성추행한 지도교수… 축소·은폐 의혹 불거진 병원… 끝나지 않은 논란
“잘못은 개인이 했지만 병원의 무책임한 조사 결과 때문에 악의적인 루머가 만들어졌고 이 때문에 제가 겪은 정신적인 고통은 상당해요. 그런데 병원은 조사가 잘못되어 유감이라는 말 한마디도 없이 언론에 ‘피해자가 지친 상태’라며 비겁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요.”
서울아산병원 소속 교수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전공의 이모씨는 지난 1월 18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병원의 잘못된 조사 방식과 결과에 대해 해명하고 병원 측의 사과를 강력히 요구했다.
전공의 성추행 사건은 가해자 홍모 교수가 자신의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과의 뜻을 전함으로써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해당 병원이 조사 과정에서 사실을 왜곡하고 은폐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이번엔 병원과 피해자 간의 갈등 국면으로 들어섰다.
술 취한 지도교수, 차에 함께 탄 여 전공의… 뒷좌석에선 무슨 일이
지난해 10월 25일, 전공의 성추행 사건은 3차 회식장소로 이동하던 지도교수의 차안에서 발생했다.
피해 전공의 이씨가 병원 측에 제출한 경위서에 따르면 피해자와 뒷좌석에 함께 탄 홍 교수가 피해자에게 갑자기 어깨동무를 해 왔고 오른손으로 피해자의 가슴을 만져 이를 피해자가 반사적으로 저지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홍 교수로부터 영어로 ‘자신이 성적으로 흥분했다(I’m a horny guy)’는 성희롱적 발언을 한 것도 들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피해자는 “당황한 나머지, 영어로 ‘적절한 행동이 아니다(It’s not right)’라고 해야 할 것을 ‘적절한 때가 아니다(It’s not a right time)’라고 잘못 말했다. 그러자 그는 ‘그럼 언제가 그때인데?(When is the right time?)’라며 추문을 계속해 왔다”고 당시 대화 내용을 설명했다. 이후 추행은 없었으나 남은 이동시간 불안감에 떨었던 피해 전공의는 자신의 어깨 위에 놓인 홍 교수의 손을 꽉 쥐고 있었다고 한다. 차가 멈춘 후 성추행 사실을 앞좌석에 동승했던 남자 전공의에게 말한 후 곧바로 집으로 귀가했다.
병원에 사건경위서를 제출한 28일 저녁, 홍 교수는 피해 전공의 아버지에게 전화해 만나서 사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피해자 아버지는 그와의 만남을 거절했고, 아산병원 측에 홍 교수의 사임을 요구했다. 이후 홍 교수에 대한 징계위원회가 열리고 아산병원장이 직접 피해자 아버지의 사무실을 찾아가 사과를 했다. 사실, 이 과정만 놓고 본다면 그다지 문제될 것도 없는 상황이다. 성추행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 여 만에 조사 및 징계가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혼란과 잡음이 발생하는 것은 왜일까.
아산병원, 소속 교수의 성추행 사실 인정하지 않아… 징계사유는 ‘만취한 죄’?
문제는 단초가 된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을 제대로 밝히지 않고 축소시키려 했던 병원의 행동에 있다. 피해자 아버지 사무실을 찾아간 홍모 교수의 행동은 처음부터 자신의 성추행 잘못을 인정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피해자 아버지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이후에 피해자 측과 불편한 진실 공방을 벌이지 않았던 것을 보아 처음부터 성추행 사실을 부인할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병원 측이 내놓은 조사 결과는 황당했다. 홍 교수의 징계사유는 성추행이 아니라 술에 취해 직원들을 끝까지 보호하지 못한 점이었다. 병원 측은 사건 당일 회식에 참석한 전공의 9명을 대상으로 면담을 진행한 결과, 피해자의 진술 내용과 달리 술에 취한 홍 교수와 피해자를 함께 뒷좌석에 태운 이유는 피해자를 배려하는 차원이었다고 판단했다. 또 조수석에 동승했던 남자 전공의가 홍 교수와 전공의 이씨가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으나 성추행이라고 인지할 만한 상황은 없었다고 진술한 것도 주요 근거로 받아들였다.
이와 관련해 피해 전공의는 “조사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A4용지 한 장짜리 경위서를 제출하는 것이 전부였다. 나를 배제한 채 조사가 이뤄졌고, 병원 측은 가슴을 만진 것을 직접 본 사람이 없으니 성추행을 당했다는 나의 진술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과를 내놓았다”며 울분을 토했다.
병원은 대체 뭘 조사했나
피해자의 주장대로 병원이 조사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유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유일한 증언자라고 할 수 있는 앞좌석의 전공의가 성추행 정황을 느끼지 못했다고 진술했으나 신체 접촉 사실만큼은 부인하지 않았다. 정황상 의혹을 가질 만한데도 피해자를 재차 불러 조사하지 않고 그대로 조사를 종결했다. 더욱이 병원장이 직접 피해자 아버지 사무실을 찾아간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인데, 이는 피해자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학계와 의료계의 유력인사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파장이 커질 것을 우려해 무마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낳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합의정신 존중할 뿐” vs 대전협·피해자 “책임 회피 급급한 병원”
지난 1월 24일 서울아산병원 측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대한전공의협의회와 피해자 측이 병원 징계위에 결과 정정과 사과를 요구한 지 78일 만이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부분이 적지 않다. 병원이 보내온 공문을 보면 “대한전공의협의회의 지적에 따라 추가적인 조사를 위해 피해 전공의에게 인사위원회에 참석해 진술해줄 것을 부탁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으나 피해자가 아직까지 이에 대한 회신이 없어 추가 조사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으며 불필요한 추가 조사는 가해자를 용서하겠다는 피해자 측의 뜻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피해자의 말에 따르면 인사위 재출석을 요청하는 서류는 하루 전인 23일, 우편을 통해 아버지 지인의 사무실로 보내졌으며 실제로 피해자가 서류를 읽어본 날짜는 24일인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 전공의는 “아버지와 내 연락처를 모두 알고 있음에도 아산병원은 내가 해당 서류를 받았는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공문에 적혀 있는 대로 여러 방면으로 무슨 노력을 했는지 묻고 싶다. 내가 제 시간에 서류를 받아 읽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요청한 지 하루 만에 피해자의 회신이 없어 추가 조사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공문을 보내올 수가 있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대한전공의협의회는 “피해자에게 서류를 검토할 시간도 주지 않고서 피해자가 답이 없다는 핑계로 책임을 교묘하게 회피하고 있다. 성추행한 교수가 진료를 보고 있고, 이러한 사실을 애써 덮으려는 아산병원의 행각을 환자들도 알아야 하기에 대대한전공의협의회는 환자단체와 여성단체, 아산재단 이사장인 정몽준 의원실에 이 같은 사실을 알릴 것”이라고 밝혔다.
김단비 쿠키뉴스 기자 kubee08@kuki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