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경래 (11) “한국 참 모습 알리자” 전 세계에 뉴스레터 발송

입력 2014-02-04 01:34


1970년대 초반 신문사 편집국장이란 자리는 영광의 자리라기보다 고통의 정점이었다. 내가 택한 길은 어쩌면 제3의 길이었다. 사회참여도 아니고 현실도피도 아닌 미래 발전안 준비였다. 사회참여보다는 복음참여를 우선했다. 71년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민간단체 사회통신연구회를 창립했다. 이진수 주관중 김종표 서영희 등이 참여했다. 한국 경제와 정치의 전망에 대해 토론했다.

연구회는 학술 연구 외 ‘코리아프렌드’라는 민간 뉴스레터를 발행했다. 한국 소식을 알리기 위해 만든 홍보지다. 전 세계 150여 개국에 1만5000부가량 배포했다. 우표 값만 매월 50만원씩 들었다. 돈은 회원 50여명의 회비로 충당했다. 71년 말 박정희 대통령이 또 호출했다. “김 국장께서 좋은 일을 하고 있더군.” “예?” 박 대통령의 설명은 그랬다.

최근 한 아프리카 국가가 박 대통령에게 자전거 1만대를 보내주면 유엔에서 한국을 지지하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당시 남·북한은 각기 한반도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하며 단독 회원국 가입을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 그 나라는 한국에 자전거 공장이 있다는 사실을 ‘코리아프렌드’를 통해 알게 됐다. 코리아프렌드 맨 뒷면에 실린 ‘삼천리자전거’ 광고를 보고서다.

나는 연구회의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나도 연구회 회원이 되고 싶소.” 박 대통령이 자청했다. “각하, 죄송하지만 저희 연구회는 순수 민간단체입니다. 대통령이 회원이 되긴 어렵습니다.” 박 대통령은 이름 없는 회원으로 받아달라고 했다. 그는 매월 후원금을 보내왔다. 이를 계기로 나와 박 대통령의 관계가 새로워졌다. 나는 박 대통령과 연구회 소식지를 겸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연구회에서 논의한 정책연구 요약본 5∼6쪽과 편지 2∼3장을 썼다. 편지는 청와대 민원실에 접수했다. 겉봉에 ‘조상호 의전실장 앞’이라고 썼다. 박 대통령의 인간성이 묻어나는 편지가 많았다. ‘내가 대통령 자리에 와 보니 무섭고 떨린다. 책임이 막중하다. 밤잠을 많이 설친다.’ ‘엄동설한에 떨고 있을 사람들 생각하면 당장 뛰어나가 담요를 덮어주고 싶다.’

73년 이동원 박사가 스위스 대사로 있을 때다. 나는 취재차 유럽을 방문했다. 전쟁 후 부흥한 독일을 ‘라인강의 기적’으로 기획 취재했다. 이 박사와 내가 몽블랑에서 스키 타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외무부 연락망을 통해 보냈다. ‘사진을 보니 나도 대통령 그만두고 자네들과 같이 스키나 타고 싶다. 늘 청와대에 갇혀 지내다니 이런 팔자가 있느냐.’

장기적으로 경제를 부흥시키려면 중공업 위주로 경제 질서를 재편해야 한다는 등 연구회의 의견을 올리기도 했다. 뉴욕타임스 런던타임스 뉴스위크 등 외신도 자주 올렸다. “지난주 뉴스위크에서 유신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보도했는데 어떻게 대응했느냐?”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물었다. 각료들은 서로 “누가 보고를 올렸나” “박통 귀신 아니냐”고 했다. 출처는 사회통신연구회 보고서였다.

몇 해 전 조 의전실장을 프레스센터에서 만난 적 있다. “옛날에 김 형이 사실 보이지 않는 국무총리를 한 10년 했어요”라며 싱긋 웃었다. 박 대통령과 주고받은 편지를 다소 과장해서 한 말이다. 박 대통령의 업적에 대해 논란이 많다. 독재자라고 비판하기도 하고 경제혁명가라고 옹호하기도 한다. 그런 평가는 모두 일면만 보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