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영석] 대한민국 국민으로 산다는 것
입력 2014-02-03 01:36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사를 1년 만에 다시 꺼냈다. 5400여자의 취임사 속에 국민은 모두 57차례 등장했다. 행복, 경제, 문화, 창조, 희망, 신뢰, 복지라는 단어와 함께 가장 많이 녹아 있었다. 취임사 속의 국민은 대통령의 동반자였으며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였다.
그로부터 1년 가까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 국민은 어떤 모습인가. 카드사 개인정보 불법 유출의 공범, 깃털을 뽑아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거위, 큰일도 아닌 것을 크게 만드는 존재다. 정부와 청와대 고위 관료들의 말 속에 담긴 2014년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뿐인가. 어떤 이는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라며 철도파업 현장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옐로카드를 꺼내 들었다. 국민 마음에 상처를 줬다고 하면서도 문책은 ‘다음 기회’로 미뤘다. 여당 원내대변인은 “박 대통령의 질책은 국민을 힐링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어이없는 논평까지 곁들였다.
정부와 여당은 고위 관료들의 문제 발언이 터질 때면 일회성 말실수라고 한다. 그런 만큼 레드카드까지 꺼낼 필요는 없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민심은 곧 잠잠해질 것이라는 인식이 기저에 깔려 있다.
그러나 이번엔 정부와 여당의 뜻과는 달리 그리 단순해 보이지 않는다. 설 연휴 기간 중 가장 많이 회자된 단어 가운데 하나는 카드였다. 고위 관료를 향한 직설적인 욕설과 함께다. 그리고 “높은 데만 있으니 우리 마음을 알 수 없지”라는 한탄도 곁들였다. ‘주류의 주류’로만 살아온 현 정부 고위 관료들의 인식에 대한 국민들의 ‘작은’ 분노다. 국민들 마음속엔 레드카드가 쌓여만 가고 있다.
시계추를 2008년 6월 10일로 되돌려보자. ‘주류의 비주류’로 분류되는 이명박 전 대통령은 늦은 밤 청와대 뒷산으로 홀로 올라갔다. 시가지를 가득 메운 촛불의 행렬을 지켜봤다. 광화문광장에선 국민들의 함성과 함께 이 전 대통령이 오래전부터 즐겨 부르던 노래 ‘아침이슬’이 들려왔다. 이 전 대통령은 “아무리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적 현안이더라도 국민들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또 국민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잘 챙겨봐야 했다”며 자책했다.
이 전 대통령의 늦은 후회는 ‘어륀지’ 발언으로 상징되는 영어 몰입교육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작은 분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시작됐다. 그리고 작은 분노는 그해 5월 2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를 통해 거리로 나왔다. 같은 해 8월 15일까지 2398회의 시위로 이어졌고, 이 전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는 50%대에서 20%대로 급전직하했다. 국민들의 작은 분노가 빚어낸 결과였다.
새해 벽두 극장가는 ‘변호인’이 점령했다. 1100만명의 관객이 변호인을 보며 배우 송강호와 함께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을 기억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대사는 관객들을 울렸다. ‘비주류의 비주류’로 분류되는 영화 속 변호인이 2014년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 있었다면 이렇게 외쳤을지도 모른다. “국민 못해먹겠네”라고.
2014년 대한민국 국민들은 스스로 1년 전 대통령 취임사 속에 등장했던 그런 ‘국민’으로 대접받고 있다고 느끼진 못하는 것 같다. 국민 마음에 상처를 주는 고위 관료들을 또 얼마나 참아줘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작은 구멍이 둑을 무너뜨리는 법이다. 작은 분노라도 계속 쌓이면 크게 폭발하게 마련이다. 대통령이 먼저 옐로카드가 아닌 레드카드를 꺼내야 하는 이유다.
정치부 김영석 차장 y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