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경래 (10) “각하께 백이 될 만한 이 소개를…” “예수 아니오?”

입력 2014-02-03 01:35


김주언은 1988년 한국기자협회보에 연재한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현주소’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대다수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권력의 유혹에 두 손을 들었지만 유혹을 뿌리치고 언론계를 고수한 인사들도 있다. 송효빈(한국일보 논설위원)씨, 김경래(경향신문 편집국장)씨가 이들로, 김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감투를 주겠다고 요청했는데도 거절한 유일한 언론인으로 꼽힌다.’

갈등했던 내 모습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박 대통령은 내 얘기를 듣고 기가 찬 듯 웃었다. “알았소. 그만 가보시오.” 박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저, 각하. 한 말씀만 더….”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 백(Back)을 가지길 원하지 않습니까? 대통령 각하는 가장 높은 분이니 백이 없지 않습니까? 각하의 백 될 만한 분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박 대통령은 뜬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분은 바다 위를 거닐기도 하시고 장님의 눈도 뜨게 하시고, 문둥병 환자도….” 박 대통령이 먼저 말했다. “그거 예수 아니오.” “예, 맞습니다. 예수님 얘기는 성경에 있습니다.” 나는 박 대통령에게 예수 믿을 것을 제안했다.

“우리 집에도 성경이 네 권쯤 있을 거요. 나하고 어렸을 적에 주일학교 함께 다닌 친한 친구가 목사요.” 나는 반가움에 이렇게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각하께서도 예수님을 백으로 삼으시면 아주 좋으실 겁니다.” 분위기가 밝아졌다. 잘 웃지 않는 그였지만 그때 그는 빙그레 웃었다. 나의 전도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 웃음은 지금도 내게 위안을 준다.

나는 사석에서나 공석에서나 성경 구절을 자주 인용하고 ‘설교’ 같은 이야기를 잘 꺼냈다. 날 따라다닌 많은 별명 중 하나가 ‘개량목사’다. 그런 이미지 때문인지 23세 때 주례자로 데뷔했다. 진주사범학교 동창생이 결혼한 지 1년도 안된 내게 주례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이후 주례 요청이 들어오면 나는 ‘잘 먹고 잘 살자’로 요약되는 3분 주례사를 하곤 했다. 인기가 좋았다.

기억나는 또 다른 별명은 ‘소공동 동회장’이다. 60년대 후반 ‘주간경향’을 만들던 시절 표지 모델을 선정하는 권한이 내게 있었다. 문화계 인사나 연예인을 만나는 장소는 주로 소공동 주변 다방과 조세핀 조나 앙드레 김 의상실 같은 곳이었다. 소공동에서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내 명함만 있으면 외상이 가능했다. 후배들이 내 명함으로 외상을 많이 했다.

연예인과 인연도 많다. 75년 코미디언 구봉서씨와 곽규석씨가 나를 찾아왔다. “예수님을 믿는 연예인들이 성경 공부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싶은데 장소가 마땅치 않아요. 남는 공간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이들은 당시 신학생이던 하용조 전도사(1946∼2011)의 인도로 성경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문화방송·경향신문 기획이사였다. 무료로 공간을 사용하도록 배려했다.

기독 연예인 모임은 날로 커졌다. 이들은 밤 11시가 넘도록 기도하고 찬양했다. 후일 연예인교회로 발전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는 한국 매스컴선교회를 조직했다. 언론인들의 영성을 가꾸기 위해서였다. 이동원 목사가 지도하던 성경 공부에 20명 정도가 참석했다. 월례 예배에는 200여명이 참석했다. 차인태 문화방송 아나운서, 김태선 동아일보 부국장이 열성적이었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