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정승훈] 철새와 습지
입력 2014-02-03 01:35
철새는 오랫동안 부정적인 이미지의 대명사였다. 선거 때가 되면 자신의 신념에 관계없이 당선 가능성만을 좇아 이 당, 저 당 옮겨 다니는 정치인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였다. 정치인들이 만든 철새에 대한 혼탁한 이미지를 그나마 바꿔 놓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습지다.
습지는 하천·연못·늪으로 둘러싸인 습한 땅으로 항상 수분이 유지되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많은 생명체에게 서식처를 제공하고, 습지의 생명체들은 생태계를 안정된 수준으로 유지시킨다. 각종 무척추동물·어류·조류의 서식지이면서 미생물이 유기물을 먹고 사는 곳이기도 하다. 미생물은 오염원을 정화하고 홍수와 가뭄을 조절하는 역할도 한다. 생물적·생태적·환경적인 면은 물론 수리적·경제적으로도 습지의 보존이 중요한 이유다.
습지의 보존을 위해 1971년 12월 이란의 람사르(Ramsar)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국제습지조약이 채택됐다. 물새 서식지인 습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조약의 가맹국은 철새의 중계지나 번식지가 되는 습지를 보호할 의무가 있으며, 조약에 가맹할 때는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를 1곳 이상 보호지로 지정해야 한다.
우포늪과 대암산 용늪 등 다수의 습지와 철새도래지가 있는 한국도 지난 1997년 7월 국제습지조약에 가입한 뒤 2008년엔 경남 창원에서 10차 람사르 총회를 개최하는 등 습지 보전과 현명한 이용을 위한 노력에 앞장서 왔다.
습지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더불어 매년 습지를 찾는 철새에 대한 관심도 고조됐다. 철새 보호가 국제적인 공통 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환경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라는 생각이 어느 정도 정착이 됐다.
하지만 최근의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사태로 인해 철새가 다시 수난을 겪고 있다. 철새가 바이러스 전파의 매개체로 여겨지면서 한때 먹이주기가 금지되고 일부 도래지에 방역이 실시되는 등 철새들의 겨울나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AI 관련 국제협력기구는 “고병원성 AI의 원인에 대해 야생조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효율적인 질병 통제라고 할 수 없으며, 생물다양성보전에도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이를 우려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2일은 국제습지조약이 지정한 ‘세계 습지의 날’이다. 습지의 날을 AI가 한창인 시점에 맞게 된 것은 퍽 안타까운 일이다. AI의 정확한 원인을 찾아 근절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와중에 습지와 철새의 가치가 훼손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정승훈 차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