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정철훈] 설에 숨겨진 시간 풍경

입력 2014-01-30 01:35


삼균주의를 제창한 민족운동가 조소앙(1887∼1958)이 프랑스 파리에 체류하던 중 프랑스어 통역도 없이 우편국에 물어 당대 최고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1859∼1941)을 찾아간 것은 1920년 2월이다. 당시 상해임정 외교특파원으로 임명되어 세계 각지를 돌며 조선의 독립 승인을 촉구하던 조소앙이 그 중차대한 시기에 왜 베르그송을 찾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일본유학 시절, 서양철학에 심취했던 학문적 호기심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영어를 못하는 베르그송과 영어·일어에 능통하지만 프랑스어를 전혀 못하는 조소앙 간의 대화는 단 두 개의 질문만으로 싱겁게 끝나버렸다. 첫 번째 질문은 ‘시간의 머리(the head of time)’에 관한 것이었고 두 번째 질문은 정반대로 ‘시간의 꼬리(the tail of time)’에 관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을 뿐 그가 베르그송으로부터 어떤 답변을 들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제 와 짚어보면 베르그송은 일상적 용어인 ‘시간’과 구별하여 ‘지속’이란 개념을 통해 시간을 설명하면서 서구 철학이 시간의 본성을 오래도록 망각해 왔다고 주장한 철학자이다. 베르그송이 볼 때 ‘시간’은 지속적으로 흐르는 것이다. 이에 반해 근대과학에서 ‘시간’은 일정한 점들이 이어진 궤적이며 선(線)으로 완결되어 더 이상 변화할 수 없는 구조이다. 하지만 ‘지속’으로서의 시간은 ‘무엇인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며 ‘무엇인가 되어가게 만드는 것’이다.

한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을 맞아 베르그송의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떠올린 것은 우리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쳐다보는 달력 때문이다. 2014년 달력엔 1월 1일이 신정으로, 1월 31일이 구정으로 적혀 있다. 하지만 구정이란 100여년 전 일제가 강요한 신정에 대한 상대적인 명칭이다. 1910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명절을 모조리 부정하고 일본 명절만을 쇠라고 강요했다. 우리의 명절인 음력설을 쇠지 못하게 1주일 전부터 방앗간 문을 못 열게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의 명절인 양력설을 쇠게 한 것이다. 일제의 강요는 세찬 반대현상을 초래했다. 사람들은 양력설을 ‘왜놈 설’이라고 부르면서 음력설을 고수했다. 이후 1949년 이승만정권은 경제 부흥을 하려면 노는 날을 줄이고 낭비를 억제해야 한다며 신정을 휴무일로 지정한 대신 달력에서 음력설을 아예 없애버렸다. 그러다 1985년 음력설은 ‘민속의 날’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을 단 채 부활되었고 그날 하루만 휴일로 지정됐다. 지금의 설날 사흘 연휴가 시작된 건 1989년이다. 당시 노태우정권은 음력설을 ‘설’이라고 명명하고 전후 3일간을 휴일로 정했다.

설은 근대적 시간체제와는 무관하게 전통적으로 ‘지속’되어 왔다는 점에서 민족의식과 맞물려 있다. 사실 우리가 양력과 음력을 혼용하고 있고 또 달력에 음력 명절이나 절기가 작은 글씨로 병기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설이 둘일 수는 없다. 1월 1일은 심정적으로 양력설이라는 의미보다는 새해 첫날 재충전을 위한 휴일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양력 1월 1일이 더 이상 변화할 수 없는, 고정되어 있는 구조라면 음력 1월 1일은 유동적이다. 양력이 기계론적 시간관에 의존한다면 음력은 의식의 차원에 의존한다.

기술문명이 발전할수록 근대적 시간강박에서 벗어나려는 개인들이 출현하기 마련이다. 20세기 초 세계 문학계를 풍미한 ‘의식의 흐름’은 그런 개인의 내면을 반영한 것이다. 베르그송 식으로 말하자면 외부의 물질세계에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표층의 자아가 아닌 유동하는 본래의 자아인 셈이다. 파리에 체류하던 조소앙이 베르그송을 불쑥 찾아간 것도 유동하는 자아의 호기심은 아니었을까. 근대라는 미명에 모든 게 빨려들어갔지만 ‘설’이 살아남은 것처럼 이 후기 산업사회에 모든 것을 상실하기 이전의 어떤 개인적 자아가 남아 있는지 되짚어볼만하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