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노석철] 이상화의 화보는 무죄

입력 2014-01-30 01:34


스물다섯살의 깜찍한 도발

신선한 충격이었다. 흰 셔츠만 걸친 채 허벅지를 과감하게 드러내고, 녹색 드레스 사이로 다리를 살짝 노출시킨 ‘빙속 여제’ 이상화. 야릇하고 도발적인 표정을 담은 화보 사진은 그가 세계신기록을 몇 번 갈아치웠을 때보다 반응이 더 뜨거웠다. 지난주 스포츠 최고 이슈는 단연 ‘이상화의 하의실종’ 사건이었다. 게다가 “얼굴은 내가 봐도 딱 나, 그치만 다리는 당연히 보정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은 트위터글, 화보를 보고 있는 그의 미소에선 세계 최강자다운 여유가 묻어났다.

팬들은 잠시 술렁거렸다. 소치 동계올림픽을 코앞에 둔 최고의 선수가 깜짝 노출로 감당하기 힘든 장면을 연출하니 적잖이 당황스러웠을 게다. 과거 ‘마린보이’ 박태환이 큰 대회를 앞두고 화보를 찍었다가 성적이 좋지 않자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기억 때문이다. 그런 걱정은 곧 잦아들었다. ‘이상화니까 그래도 된다’는 암묵적인 동의라고 할까. 그동안 그가 보여준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 물집투성이 발바닥, 흐트러짐 없는 자세에 어느새 ‘이상화는 뭘 해도 괜찮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화보에선 ‘나도 아름다운 여자’라는 항변도 느껴졌다. 폭발적인 스피드를 위해 허벅지 근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 하면서도 걸그룹의 날씬한 다리가 부러운 스물다섯 이상화의 마음이 배어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는 전신 수트를 입고, 가냘픈 여성미 대신 파워와 스피드로 무장해야 하는 종목 특성상 여성으로서 마음 한켠엔 늘 허전함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화보는 올림픽을 앞둔 그에게 허락된 ‘화려한 외출’이다.

언론들은 한때 그에 대해 ‘꿀벅지’ ‘금(金)벅지’ ‘철벅지’란 제목을 달아 기사를 쓰곤 했다. 요즘은 거의 그렇게 안 쓴다. 그의 경이로운 위업이 희화화될 수 있고, ‘여제’가 그런 제목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10월 미디어데이에서 “금벅지라는 별명보다 빙속 여제가 더 마음에 든다”며 우회적으로 언론 보도 가이드라인을 정해줬다. “몸무게를 5㎏ 줄였고, 요즘 단거리는 슬림한 몸매가 대세”라고도 했다. 그리고 보란 듯 한껏 멋을 부리고 화보를 찍었다. 파워 넘치는 세계 최고 여성 스프린터로, 그리고 뛰어난 미모를 갖춘 여성으로 모두 인정해 달라는 거침없는 선언이다. 그의 의도대로 네티즌들은 ‘이상화에게 이런 매력이 있었구나’라고 탄복했다. 작전 성공이다.

김연아와 경쟁심도 작용한 듯

한편으로는 ‘피겨 여왕’과의 경쟁심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상화와 김연아는 어려서부터 친했고, 각자 최강자 자리에 섰다. 두 국보급 스타의 업적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그래서 두 선수에게 ‘피겨 여왕’과 ‘빙속 여제’란 동등한 타이틀이 주어졌다. 이상화는 아시아인으로 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금메달을 처음 따낸 개척자다. 육상으로 치면 100m 경기에서 우리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딴 것에 비유된다. 게다가 최근 뼈를 깎는 훈련 끝에 인간의 한계까지 넘나드는 그를 더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

그러나 고난도 기술과 예술성을 강조하는 피겨는 다양한 동작과 표정이 연출되기 때문에 김연아가 압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에 비하면 이상화는 억울하게 홀대를 받은 셈이다. 이는 트랙을 도는 모습과 결승선 통과 후 울고 웃는 표정 외에는 다양한 장면 연출이 어려운 종목 특성 탓도 크다.

그래서 이상화는 속으로 ‘내가 미모와 실력에서 연아보다 못한 게 없다’며 화보 촬영을 감행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화보로 마음속 응어리를 털어냈다면 그의 올림픽 2연패에 청신호다. 그리고 올림픽이 끝나면 그가 억눌러왔던 끼를 어떻게 분출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노석철 체육부장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