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진 목사의 시편] 어떤 외국인 아내
입력 2014-01-30 01:31
자살미수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한 외국인 아내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게 쉬워서 죽음을 택했는데 그마저도 실패했다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죽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그녀를 무슨 말로, 그 어떤 것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말을 꺼내기조차 싫어하는 그녀의 사연은 20여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필리핀 마닐라 거리에서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 한 마디가 시작이었다. 그녀는 코리안 드림을 가슴에 담고 열아홉 어린 나이에 스무살 연상의 한국 남자를 만나 한국으로 결혼이민을 왔다. 수도권에 가까운 농촌 마을에 정착해 ‘다문화가정’을 이뤘다. 남편은 처음 얼마 동안 어린 나이에 타국에 와서 고생한다며 위하는 듯했지만 1년도 가지 않았다. 환경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음식과 생활양식까지 같은 게 하나도 없던 그들은 자주 충돌했다. 남편은 술에 만취해 들어오기 일쑤였고 때로 외박도 했다. ‘음식을 못 한다’ ‘농사일이 왜 그 모양이냐’ 등 타박이 심해졌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이었기에 답답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손찌검도 수차례 당했다.
20여년 이곳에 살면서 친정에는 한 번도 가지 못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동생이 결혼했을 때도…. 엄마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엄마가 보고 싶어 제정신이 아닐 정도였지만 가지 못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가 둘이나 생겼다.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아이들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기르고 싶다는 마지막 작은 소망을 갖게 됐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엄마의 사정을 알아주겠지’ ‘그때 친정도 가고 친구들도 만나야지’라고 기대하며 어린 외국인 엄마는 참고 또 참았다.
중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하루는 얼굴이 상처와 눈물로 뒤범벅된 채 욕을 하며 대들었다. ‘도대체 엄마의 정체가 뭐냐’ ‘왜 내 얼굴과 피부가 이러냐’며 다짜고짜 따지는 아들의 몸부림에 어찌할 줄 몰랐다. 가슴이 무너졌다. 그녀의 코리안 드림은 산산조각난 지 오래다. 이제는 일그러지고 부서진 자화상에 하루라도 빨리 죽고 싶다는 소원 하나만 남았다.
물론 다문화가정이 모두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불과 반세기 전 우리나라는 세계 최하위 빈국이었다. 장충체육관도 필리핀에서 지어주지 않았던가. 우리 부모님 시절, 그들이 얼마나 많은 쌀과 음식과 옷을 주었던가. 그런 도움이 없었다 해도 기독교 인구가 1000만명도 더 된다고 자랑하는 우리 조국 땅에서 ‘죽는 게 소원’인 사람을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성경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 했다. 도움이 필요한 그들과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영적으로, 아니 따뜻한 사랑의 말이라도 한마디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수원중앙침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