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부지’ 비난보단 사랑과 희망을…설 앞둔 미혼모자시설 르포

입력 2014-01-29 13:40 수정 2014-01-29 15:42


설 명절이 코앞에 다가왔지만 가족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아기 엄마들이 있다. 이들은 죽음을 무릅쓴 고통 끝에 새 생명을 탄생시켰지만 축하는커녕 손가락질을 받곤 한다. 법적 남편이 없는 미혼모들이다. 가부장제 사회 속 ‘불장난을 한 철부지’ 정도로 낙인찍혀 불완전한 반쪽 인생을 살아야 하는 미혼모의 설 명절을 미리 찾아가봤다.

불안감

서울 공릉동 2층 단독주택. 이곳은 5명의 미혼모들이 자신의 성과 같은 아기들과 함께 지내는 ‘꿈나무 미혼모자 공동생활가정’이다. 인터뷰 전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다. 얼마 전 태어난 막내 이야기부터 꺼냈다.

“저도 최근에 예쁜 딸을 낳았어요.” “어머, 그래요? 지금 한참 힘들 때인데, 와이프가 앞으로 고생 많으시겠다.” 김영신(가명·27)씨 품에서 10개월 된 토실토실한 수진(가명)이를 받아 안았다. 생글생글 웃었다.

수진이의 아빠는 군인이다. 김씨와 동갑내기인 생물학적 남편은 임신사실을 알리자 “근거를 대라”며 몰아붙였다. 김씨는 법정의 도움으로 DNA 검사 끝에 친자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입양동의서 정도는 써줄 수 있다. 양육비를 청구하고 싶으면 법대로 해보라”며 엄포를 놨다.

“오는 2월부터 패스트푸드점에서 일을 해요. 수진이는 24시간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맡길까 싶어요. 친정 엄마는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아빠는 절대반대에요. 설에도 집엔 못가요. 당분간 친구 집에서 일을 다녀야 할 것 같아요. 두 식구가 살려면 돈을 벌어야죠.” 돈벌이와 육아의 깊은 고뇌가 묻어났다.

옆에 있던 이진영(36·여)씨도 입을 열었다. 이씨의 아들 호성(1)이는 서울대병원에서 인공 항문을 다는 큰 수술을 받았다. 생활보호 대상자인 이씨는 수천만 원의 병원비를 자선재단을 통해 도움 받았다.

“애 아빠는 경제력이 안 되는 인간이었어요.” 이씨의 목과 팔목에 나 있는 베인 듯한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호성이를 낳기 전엔 희망이 없었어요. 그래서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죠. 아이를 낳은 후부턴 제 인생이 달라졌어요. 이젠 칼로 그런 짓 안 해요.” 호성이의 배에 설치된 인공항문 주머니를 살펴보던 이씨는 아기를 안고 방으로 달려갔다. 아이가 커가면서 활동량이 많아져 변이 자주 흐른다고 했다.

안정

‘산부인과-산후조리원-친정집·시집’이라는 정통 코스를 밟는 일반 산모와 달리 이들은 산부인과에서 곧바로 이곳으로 들어왔다. 같은 처지에 놓인 미혼모는 아기와 함께 방 1개씩을 사용한다.

28일 점심식사때는 설을 앞두고 떡국을 끓였다. “국물 간은 이렇게 하면 좋아.” “쌀떡이 너무 불지 않도록 불 조절을 잘해야 해.” 자원봉사자들이 미혼모들에게 조리법을 가르쳐주며 대화를 나누는 ‘쿠킹 데이’를 진행했다.

1층 85㎡의 공간이 떡국 냄새로 가득 찼다. 2층에 있던 수빈이 엄마도 내려왔다. 엄마가 무뚝뚝해서 그런지 수빈이의 얼굴에서 웃는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 같은 층에는 19살 엄마도 있다. 회사에서 띠 동갑 남자를 만나 사랑을 나눴지만 임신사실을 알고는 휴대폰 번호를 바꿨다고 했다. 아빠는 “바뀐 전화번호를 절대 알려주지 말라”며 직장동료에게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자, 우리 식사 기도부터 해요.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이렇게 예쁜 공주님과 왕자님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족 최대의 명절 설을 앞두고….” 자원봉사자 이연수(53·여)씨의 집은 경기도 김포다.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 2시간 거리의 이곳을 매주 화요일마다 찾는다. 이씨가 구연동화를 하자 수진이와 호성이가 생긋 웃었다.

공동생활가정에선 미혼모의 교육, 상담, 직업재활부터 아기 백일과 돌잔치까지 열어준다. 거주할 수 있는 기간은 최장 2년이다. 김씨는 “임신소식에 주변의 반응은 한결같이 ‘아이를 지우거나 입양 보내라’는 것이었다”면서 “수술로 아이를 지우는 게 무서워서 낳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희망

사랑이 없으면 남의 실수 앞에 정죄하기 쉽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는 군중 앞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하셨다. 미혼모를 정죄하는 것은 암에 걸린 환우에게 “어떻게 그런 몹쓸 병에 걸린 거냐”며 조롱하는 것과 같다.

공동생활가정은 비난하기보다 사랑으로 끌어안고 희망을 갖게 하는 곳이다. 살림살이가 넉넉한 것은 아니다. 서울시에서 일부 지원을 받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임차료만 보증금 5000만원에 월 130만원이다. 창문 전체를 김장용 비닐로 막고 1회용 기저귀가 아닌 천기저귀를 쓰는 것도 재정문제 때문이다.

박미자(53) 원장은 “미혼모들은 아이 아빠로부터 받은 배신감, 부모로부터의 외면, 육아의 어려움, 사회적 편견 등 복합적 문제로 고통당하고 있다”면서 “사회적 편견을 이겨내고 이들이 떳떳하게 자립할 수 있도록 한국교회 성도들이 적극 나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원봉사자 민해기(57·여)씨도 “미혼모들이 진심으로 아기를 안지 못하는 것은 상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며 “환경에 대한 분노와 가족사에 얽힌 문제가 복잡한 만큼 무기력한 마음을 끌어올려줄 수 있는 상담인력이 절실하다”고 이여기했다.

호성이의 대변주머니를 갈고 온 이씨가 손가락을 오무리며 말했다. “이제는 요만큼, 아주 조금씩 희망의 빛이 보여요. 이곳이 아니었다면 우리 두 식구는 아마도 길거리에서….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꼭 취득해서 아이의 뒷바라지를 해주고 싶어요.”

생명이라는 절대가치는 모든 것을 상대화시킨다. 미혼모를 향한 숱한 편견과 조롱, 값싼 동정도 생명의 소중함 앞에 사그라져야 한다. 마치 1000, 1만, 1억 곱하기 0이 0이 되듯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070-8955-0804)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