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기웅] 안중근, 그를 읽는 역사의 문법
입력 2014-01-29 01:34
나는 ‘파주출판도시 조성’을 진행해 오면서 안중근을 크게 배웠으며, 그의 진실을 깨달았다. 나의 이 고백은, 우리 현실이 안고 있는 심각한 병리현상을 직접 부딪쳐 겪거나 고민해 보지 않고는 안중근의 참뜻, 참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스물다섯 해 동안 출판도시 프로젝트에 매달려 허우적거릴 때마다 나는 뤼순 감옥에 수감 중이던 안 의사가 1909년 11월 6일 일본 관헌에 낸 ‘안응칠 소회(所懷)’를 꺼내 읽고, 큰 위안과 함께 용기와 지혜를 얻곤 했다.
언덕 위에 굳게 선 평화주의자
“슬프다! 천하대세를 멀리 걱정하는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옳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생각다 못해, 하얼빈에서 총 한 발로 만인이 보는 앞에서 늙은 도적 이토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놀라운 이 문맥을 보라. ‘동양 청년’이다. 조선 청년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 청년 모두를 향해 그는 외치고 있다.
동아시아는 지금까지 역사의 기류가 난마처럼 얽혀, 가히 패러독스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안중근은, 그가 거사를 벌였던 때로부터 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 역사 위에 아름다운 가치로 빛나고 있다. 그의 말 속에는 오늘 벌어지고 있는 세계의 흐름이나 동아시아의 국면들이 이미 예언돼 있고, 그 해법까지도 제시돼 있으니 말이다.
그는 인간주의의 승리를 증언하며 평화주의자로서 역사의 언덕 위에 굳건히 서 계신다. 이런 풍경에 감히 누가 흠집을 내려 하는가. 일본이 어떤 근거로 안중근을 ‘범법자’라 폄훼하는가.
안중근은 하얼빈 역두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동양 평화의 이름으로 처단했다.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이렇게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법정에서 ‘안중근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전략가인 그가 일본에 맞설 유일한 방법으로 시작한 ‘역사의 전쟁’, 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거사 당시 안중근은 참으로 보잘것없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1929년 뉴욕과 런던에서 동시 발행된 ‘아시아의 명인들(Eminent Asians)’이라는 책은 그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당시 동방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영웅들,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스탈린, 쑨원, 무스타파 케말, 마하트마 간디 등 여섯 인물을 소개하는 책자다. 한 대목을 옮겨본다.
시대를 뛰어 넘는 위대한 영웅
“1909년 10월 26일 아침, 중국-러시아 도시 하얼빈에서 이토는 아홉시반으로 예정돼 있는 러시아군 의장대 사열을 받기 위해 기차에서 내렸다. 사납게 생긴 한 조선인이 측면에서 돌진해서는 이토의 복부를 향해 총을 쏘았다. ‘바보 같으니!’ 낮은 목소리로 외치고 이토는 쓰러졌다. … 이토는 열차로 옮겨졌다. 삼십분 후, 그가 유년시절에 동경했던 오다 노부나가의 시를 읊으면서 숨을 거두었다. … 그의 죽음은 영광스러웠다. 라이벌인 미친 암살자의 손에 죽었으므로.”
이 책이 나온 때로부터 열두 해가 지난 1941년, 일본은 세계 군림의 야욕을 드러내는 구체적 행동으로 미국과 영국을 향해 선전포고하면서 그해 12월 8일 하와이 진주만을 잔인하게 폭격했다. 태평양전쟁, 그리고 종전(終戰) 처리 동안 일본과 미국과 영국은 과연 선린(善隣)의 관계였던가. 생전의 이토는 일본의 최고 정치가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나 지금 그는 ‘안중근 전쟁’의 작은 희생자일 뿐이요, 오히려 안중근은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영웅이 되었다. 역사의 생명력은 일시적으로 왜곡되었던 현실을 서서히 바로잡아준다.
안중근을 ‘범법자’라 일컬었던 치졸한 일본의 관방장관 스가 요시히데를 비롯하여 속 좁은 왜인들에게 이르노니, “안중근은 ‘역사언어의 문법’으로 논해야 한다!”
이기웅 열화당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