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강은교] 그믐달
입력 2014-01-29 01:34
첫 번째 그림:
몇 사람이 추운 길거리에 웅숭거리고 서서 무언가 의논하고 있다. 가만히 들어보니, ‘어느 식당으로 갈까요? 선생님은 무얼 좋아하세요?’하는 이야기들이다. “아아∼ 좋은 데가 하나 있어요! 우리집이요.” 내 목소리였다.
“아직 멀었어요?” “아뇨, 다 왔어요.” 나는 나의 옛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찾는 간판은 없었다. “수미정, 한정식집이었는데…, 분명 여기 있었는데….” 그때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저기 있군요. 간판이 내려져 있는데요?” 그러고 보니 수미정이라고 필기체로 쓴 멋진 간판이 마당 한 구석에 전선줄과 함께 팽개쳐져 있었다.
그다음 그 도시로 갔을 때 나는 옛날 우리집이었던 나의 ‘그 옛집’으로 가보았다. 그러나 ‘수미정’이라는 멋진 필기체의 간판도 없어지고 거기엔 검붉은 벽돌의 빌라 한 채가 서 있었다. 마당도 아주 매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향나무까지 서 있었다.
두 번째 그림:
한참 그 앞에 서 있자니 향나무 앞이 갑자기 술렁대기 시작했다. 하얀 모시 한복을 입으시고 뒷짐을 지신 아버지가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골목길 쪽을 바라보며 서 계셨다. 향나무 앞에 꽃밭이 슬금슬금 나타나더니, 거기 작약이며 글라디올러스, 봉숭아 따위가 어지럽게 바람에 출렁여댔다. 갓 시집온 새 색시 ‘영주 언니’가 색시 저고리 소매를 훌떡 걷고 노오란 생선전을 가득 접시에 담아들고 서 있었다.
빌라 마당 가운데 쯤, 대청마루엔 어느 새 정갈하게 돗자리가 펴져 있었고 차례상이 차려져 있었다. 두루마기를 입으신 아버지 옆에 한복을 차려입고 선 형제들, 어머니도 대청마루 끝에서 상 위를 둘러보시며 서 계셨다. 혹시 올해는 잘못된 것이 없나, 보시는 듯했다. 뫼에 숟가락이 꽂히고… 어머니가 조그맣게 소리치신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젓가락을 놓지 않았네. 종종걸음을 치신다. “허허, 조상님도 이해하시겠지.” 아버지의 굵은 목소리, 모두 킥킥댄다. 빠진 것이 왜 없나 했지, 없을 리가….
그러다 언젠가부터 명절 행사는 자꾸 줄어들고 그 몸집도 작아졌다. 슬슬 없어지는 것도 생겼다.
그렇게 올해도 설 명절은 온다. 나의 옛집이 수미정으로 바뀌고 수미정은 다시 ‘요상한’ 이름의 빌라로 바뀌면서…. 올해 달은 더 밝다. 어느새 은빛 그믐달로 물들었다.
강은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