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경래 (9) 박정희 대통령 “함께 일하자” 제안 정중히 거절

입력 2014-01-29 02:31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이동원 박사에게 철학과 소신, 정세와 향후 판도에 대해 물었다. 그의 지식과 견해에 탄복한 김 정보부장은 그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천거했다. 보름 후 이 박사는 박 의장의 비서실장이 됐다. 1964년 7월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그의 나이 39세. 이 장관은 한·일 외교회담, 월남파병, 국내 기업의 중동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62년 2월 박 의장과 출입기자들이 대화를 나누는 중 어떻게 하면 농촌을 잘 살게 할 것인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경기도 광주에서 김용기라는 분이 광주농군학교를 운영하고 있어요. 농촌개혁운동을 하시는 거죠. 한번 찾아가 보십시오.” 농군학교 옆에서 교육 활동을 하는 사촌 형으로부터 김 장로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서다. 광주농군학교는 나중에 가나안농군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바로 다음날 출입기자였던 나와 이만섭 유혁인 이종식 등이 박 의장을 따라갔다. 김 장로는 박 의장에게 농촌 현실과 나아갈 방향에 대해 1시간 남짓 열정적으로 강연했다. “사람의 생각이 바뀌어야 새 사람이 되고, 새 사람이 모이면 새 마을이 됩니다. 새 마을이 뭉치면 새 나라가 될 것입니다.” 박 의장은 김 장로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며 감사했다. 박 의장은 김 장로에게 들은 농촌개혁 운동을 새마을운동으로 발전시켰다.

편집국장에 취임한 지 두 달쯤 지났을까. 71년 11월 하순 말쑥한 청년 2명이 나를 찾아왔다. “모셔오라고 하십니다.” 청와대로 갔다. 대통령 집무실로 안내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악수를 청했다. 대뜸 물었다. “요즘 신문사 재미있어요? 나와 함께 일할 생각 없소?” 갑작스러웠다. “일주일 정도 시간을 줄 테니 생각해보고 연락 주시오.” 청와대 대변인 제안이었다.

나는 갈팡질팡했다. ‘걸핏하면 기사 문제로 여기저기 끌려 다닐 국장 그만 두고 감투나 써볼까?’ ‘무슨 소리! 아무리 힘들어도 20년 지켜온 정도를 가야지.’ 조언을 구했다. 함석헌 선생은 언론의 행태를 질타하는 바람에 말도 못 꺼냈다. 최석채 조선일보 주필은 “나 같으면 안 가겠네”라고 했다. 나의 멘토 오소백 선생은 “그걸 말이라고 해!”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가장 존경하던 홍종인 선생을 찾았다. 일본말로 역정을 냈다. “오마에모카(너마저 간다는 거냐)? 도대체 기자라는 사람들은 왜들 그러나.” 나는 마음을 정했다. 언론인의 길을 지키겠다고. 일주일 뒤 박 대통령을 다시 찾았다. “각하, 아무래도 저는 신문사에 남는 것이 편할 것 같습니다. 원래 배운 게 신문밖에 없어서.” 잠시 뒤 내가 말했다.

“옛말에 자기가 키우는 강아지한테 밥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 이 개가 주인집 아이를 문다고 했습니다. 군대와 공무원 사회는 계급사회 아닙니까? 모두 진급하기를 학수고대하는데 어느 날 아침 특채된 사람이 자기 윗자리에 오르는 걸 보면 사기가 꺾이지 않겠습니까?” 실제 당시 정부는 언론인 교수 등 많은 인사들을 특채했다. 공무원 조직 안에서는 ‘낙하산’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

나는 부대변인을 대변인으로 승진시킬 것을 권했다. 박 대통령은 각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내가 한 기자에게 청와대 대변인 자리를 제안했다. 근데 이 사람이 나한테 ‘당신 강아지 밥이나 잘 주라’며 거절하더라.” 이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금세 퍼졌다. 아마 당시 공직사회에 인사에 대한 불만이 컸기 때문이리라.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