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경래 (8) ‘코리아환상곡’ 안익태 선생 업적 국내 첫 소개

입력 2014-01-28 02:31


나는 1971년 9월 경향신문 31대 편집국장이 됐다. 내 나이 43세. 언론에 투신한 지 20년 만에 ‘신문사의 꽃’이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야 영광이지만 결코 즐겁지 않았다. 1963년 5월 천주교 측으로부터 경향신문을 인수했던 이준구 사장이 물러났다. 66년 4월 ‘공매’라는 방식으로 신문사 사주가 바뀌었다. 편집권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던 송건호 편집국장은 경영주가 또 바뀌자 사표를 냈다.

이때부터 71년 말까지 5년 동안 편집국장이 6차례 바뀔 정도로 신문사는 혼란스러웠다. 이 기간 편집국장이 전무나 부사장을 겸임했다. 취재 부국장이던 내가 실질적 편집국장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내가 국장이 된 2년 동안 나라는 격동했다. 69년 삼선개헌, 71년 대선과 남북적십자 회담, 72년 7·4남북공동성명에 이어 10월 유신. 10월 유신 후 모든 신문 기사가 당국의 검열을 받았다. 이어령 논설위원은 당시 우리 신문에 ‘내일의 한국인을 위한 에세이-아들이여 이 산하를’을 연재하고 있었다. 기발한 상상력으로, 때로는 무자비한 독설로 문단에 폭풍을 몰고 다니던 그였다. 12월 중순 이 위원이 며칠째 출근을 하지 않았다. 서울 삼선동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한숨지었다.

“검열을 하니 글을 쓸 수가 있어야지. 지난달 내 ‘여적’ 칼럼 읽었소? 어디 그게 글입니까? 제멋대로 깎고 넣고. 붓을 꺾는 편이 차라리 낫겠소. 유신인가, 유령인가 하는 이 사태 오래 갈 것 같죠? 박통(박정희 대통령)이 김일성을 걸고 시작한 도박이니….” 그는 나에게 부탁했다. “나, 파리에 보내줄 수 없겠소? 특파원으로.” 나는 편집국장으로서 사장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이 위원은 현장 기자 경력이 전무한 첫 해외 특파원이 됐다. 그는 73년 2월부터 반년 동안 특파원 자격으로 파리에 머물렀다. ‘25시’의 작가 버질 게오르규를 인터뷰하고 한국에 초청했다. 재독음악가 윤이상을 한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이어령은 말년에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됐다. 나와의 교제가 그의 회심에 영향을 미쳤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기자는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만남을 계기로 책을 쓰기도 하고 알맞은 자리에 추천하기도 했다. 65년 여름 외신부장이던 나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안 선생을 만났다. “저 좀 봅시다.”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출입하던 시절 서울국제음악제 추진을 위해 건물을 드나들던 그와 안면이 있었다. “선생은 역사를 기록하는 기자시니 내 부탁을 들어주세요. 제가 한국에 가면 친일파라 모함을 받아요. 저를 좀 변호해 주세요.” 음악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지만 노 작곡가의 청을 물리칠 수 없었다. 나는 65년 9월 안 선생이 스페인에서 숨진 뒤 그가 준 자료를 바탕으로 일대기를 정리했다. 이듬해 ‘코리아 환상곡-안익태의 영광과 슬픔’(현암사)이라는 책이 나왔다. 이 책은 한국이 낳은 최고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안익태를 국민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나는 누구를 만나나 예수님이 그러신 것처럼 섬기려고 노력한다. 상대에게 일자리가 필요하면 자리를 부탁하고 돈이 필요하면 모금을 하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이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62년 3월 이동원 국제학술원 원장은 ‘차기 정권의 담당세력’이라는 제목으로 경향신문에 3차례 기고했다. ‘구 정치인을 규제한다고 새로운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센티멘털리즘이다’라는 등의 과격한 표현이 있었다.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지 1년이 채 안 되는 시점이었다. 며칠 후 청탁자인 나와 기고자인 이 박사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대면했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