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회를 위하여-학교 떠난 아이들을 품자] (4) 학업 중단하게 하는 과도한 학습 부담

입력 2014-01-27 01:38


“내겐 국·영·수 필요 없는데 왜 야자까지 해야 하나”

지난해 3월부터 부산의 한 위탁교육기관에 다니는 여고생 상미(18·이하 가명)는 전에 다니던 고교에서 전교 꼴등이었다. 중3 때까지는 300명 중 180등쯤을 유지했는데 고등학교에 간 뒤에는 “종 치면 엎드려 자고 시험은 무조건 찍는” 공식 꼴등이 됐다. “2학년 올라가니까 쌤(선생님)들은 공부 못하는 애들 무조건 때리고 뒤에 나가서 서 있으라고 하고. 기분 진짜 더러웠어요. 여기 안 왔으면 진작 학교 때려치웠을 거예요.” 상미가 말했다.

전남 광주의 위센터에서 만난 성훈(18)은 경쟁 심한 자율형사립고에서 꼴찌를 헤매다 지난해 6월 결국 학교를 그만뒀다. “한눈 팔다 문득 정신 차려 보니 수업이 뭔 얘긴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이게 성훈이 전하는 꼴찌 되기의 과정이었다. 뒤늦게 학원도 다녀봤지만 한번 처진 속도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애들은 다 잘하고 수업은 걔들 맞춰서 하니까 절대 못 따라가요.”

◇아이들 밀어내는 학습부담=보통교육을 목표로 한 학교에 규격화된 교육과정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국의 학교는 모두에게 동일한 것을, 그것도 같은 속도로 이수할 것을 요구한다. 제시되는 교과과정은 대학입학을 전제로 짜여 있다.

“공부 그거 못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솔직히 모두가 잘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하지만 상미가 인터뷰 도중 억울해하며 되물었듯, 많은 아이들은 실패밖에는 경험할 수 없는 학교를 답답해하고 분노를 느꼈으며, 자학하거나 무기력에 빠져들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아이들은 학교를 떠났다.

국민일보가 만나본 학교이탈 청소년 40명 중에는 “수업시간에 자면서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나 항상 한심했다”거나 “그냥 멍청히 앉아만 있어야 하는 수업시간이 미칠 것 같았다” “내겐 국·영·수가 필요 없는데 아침 보충(수업), 저녁 야자(야간자율학습)까지 왜 해야 하나” 같은 하소연들을 하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다수가 성공할 방법은?=흥미로운 건 이런 아이들 중 상당수가 수준에 맞는 대안학교나 위탁교육 프로그램으로 옮긴 뒤에는 “공부도 할 만 하더라”는 식으로 태도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자타공인 꼴찌라던 상미는 위탁교육기관에 온 뒤 “제법 성적이 괜찮아졌다”며 수줍게 웃었다. 개중 잘하던 영어는 1등급, 제일 싫어하던 과학도 2∼3등급으로 올랐다. 상미는 “수업 수준이 나랑 맞고 선생님들도 잘해준다. 대학은 꿈도 안 꿨는데 요즘엔 ‘대학 한번 가볼까’ 그런 생각도 한다”고 말했다.

인문계 고교 입학 직후 자퇴한 뒤 지금은 위탁교육프로그램에 다니는 강석(19)이도 똑같은 얘기를 했다. “신기한 건 여기 와서는 내가 공부를 해요. 내가 공부를 다 한다니까요(웃음). 수업이 거기(자퇴전 다니던 학교)보다 안 어려우니까. 공부 양을 조절해 주고 강요 안하 니까. 안 힘든 거죠, 공부하는 게. 쌤들도 공부 못하는 애들 차별하고 그러지 않고.”

“교실에 앉아 있는 것만도 사람 미치는 일”이라던 강석이는 수준에 맞춰 양을 조절하고 교습법을 바꾼 학교 덕에 생애 처음으로 교실에서 ‘고문’이 아닌 ‘학습’을 경험하고 있었다.

◇많고 어려운 한국의 교과과정=한국 학생들이 많은 양을, 오래 공부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실시한 국제학업성취도조사(PISA)를 보면 한국 아이들은 핀란드(4시간22분)의 두 배인 주당 9시간을 공부하고도 학업 성취도는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사걱세) 설문조사 결과(그래픽1) ‘학생의 99%가 고통받고 있다’는 수학을 예로 들어보자. 2012년 기준 PISA 수학 평균점수가 554점으로 2위 일본보다 18점이나 높은 나라에서 ‘수학 포기자들이 많다’는 얘기는 왜 나오는 걸까.

사걱세 안상진 부소장은 “양이 많고 난이도가 높은 것도 문제지만 모든 학생들에게 동일한 것이 요구되는 구조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에서는 공과계열 지망생들이 배우는 미적분학을 한국에서 어문사회계열 지망생까지 모두 배워야 한다. 영국 대입준비과정(sixth form college) 재학생이 배우는 고급 수학에 한국에서는 고교생 전체가 매달린다. 모두가 대입용 ‘레벨 상(上)’에 맞춰 공부하려니 다수가 열패감을 느끼게 된다는 얘기다.

숭실고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김승현 교사는 ‘경쟁’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는 “학습의 절대량도 문제지만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의 차이가 벌어지게 되고 뒤처진 아이들이 패배자라는 좌절감을 느낀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사교육은 이런 격차를 극단적인 수준으로 벌려 놓는다. 선생님이 하는 얘기가 내게는 새로운데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한 다른 아이들은 이미 수업내용을 다 알고 있는 듯한 상황이 반복된다고 가정해보자. 선생님이 모르는 걸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다. 교사는 앞선 학생들의 속도에 맞추고 나머지 아이들은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이민선 서울학습도움센터 팀장은 “그나마 초등학교 때까지는 따라갈 만한 차이였겠지만 중학교 무렵에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학력차가 벌어진다. 사회경제적 격차가 사교육을 통해 교실 내 학력차이로 이어지는 셈”이라며 “사회경제적 격차가 만든 이런 속도 차이를 학교가 더 이상 방치해서는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이영미 정승훈 차장, 이도경 김수현 정부경 황인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