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러시아 나홋카 박광배 선교사] 구소련 영적 장벽 무너지던 날 ‘준비된 두 사람’이 있었다
입력 2014-01-27 01:31 수정 2014-01-27 08:51
우리시대에 열린 전문인 선교시대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재능을 활용해 선교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선교든 교회 일이든 하나님께서는 직분과 관계없이 헌신하는 자를 통해 일하십니다. 저는 ‘열방우체국’에서 러시아 선교를 설명하기 앞서 평신도 전문인들에 의해 시작된 구소련선교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구소련지역 선교는 1985년부터 국내 평신도 전문인들의 재능기부에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구소련에 대한 국내 정서는 너무도 좋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어라도 하면 간첩으로 오해 받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에 헌신된 분들은 러시아어를 익혀 구소련 선교의 발판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능숙한 러시아어로 한국을 방문한 발레단이나 공연관계자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일일이 러시아어 성경을 보급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저도 88년 서울 올림픽 때 러시아어 자원봉사자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러시아어 알파벳과 전도용 문장 몇 개만 알았기에 다른 봉사자와 함께 다녔습니다. 구소련 선수들에게 러시아어 성경을 보급하는 동료 자원봉사자를 보며 다음과 같은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머잖아 선교사가 구소련지역에 복음을 들고 갈 수 있겠구나.’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공산주의 종주국’인 구소련의 문은 열리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당시 구소련은 중국과 함께 무너지지 않는 영적 만리장성처럼 느껴지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간표는 우리의 예상과 달랐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면서 구소련은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고 외국인 출입을 허락했습니다. 그러자 1991년 선교사들이 구소련권 국가들로 물밀듯이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이때를 위해 일찍이 두 분을 준비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의 부름을 받아 평생을 요직에서 일하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개방 전부터 러시아에 대한 많은 지식을 쌓았고, 러시아어에도 능통했습니다.
이들 중 한 분이 소련선교회 설립자인 고(故) 김영국 장로입니다. 다른 한 분은 전 통일부 장관인 강인덕 박사입니다. 당시 두 분은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한 뒤 평신도로서 선교에 기여했습니다.
김 장로께서는 퇴직 이후 모든 시간을 러시아 선교에 헌신하셨습니다. 소련선교회를 설립하고 선교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등 선교사 훈련 및 파송을 도왔습니다. 당시 극동문제 연구소 소장이셨던 강 박사께서는 구소련의 정치상황,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지역 정보 등을 선교사 후보생에게 강의했습니다.
이후에도 김 장로께서는 본인에게 훈련받고 파송된 러시아 선교사들의 사역지를 모두 순회하며 현지에 무사히 정착토록 지도해 주셨습니다. 두 분은 제게 ‘정년퇴직 이후 하나님께 헌신하는 제자’의 본보기가 돼 주셨습니다.
이분들께 선교사역과 신앙에 영향을 받은 전문인 평신도 사역자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 중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인물은 부산대 노어노문학과 이용권 교수와 최동규 교수입니다. 이 교수는 부산 호산나교회에서, 최 교수는 부산 수영로교회에서 러시아어예배를 돕고 계십니다. 지금은 제자들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안수를 받아 각자의 교회에서 러시아어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활동무대는 국내를 넘어섰습니다. 구소련권 국가의 현장 선교사로 파송된 제자들은 다양한 선교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는 구소련권 선교지만의 현상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한국외대에서 평생을 포르투갈어 교수로 일하신 조이환 교수 역시 이러한 사역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아마 평신도로서 세계선교에 기여한 분을 모두 소개하려면 이 지면이 부족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시간에 순종하다
처음부터 러시아선교사를 지원한 건 아닙니다. 제 관심은 중국에 있었습니다. 선교를 염두에 두고 신학을 공부했던 저는 1990년 중국대륙과 홍콩, 대만을 두루 다니며 중국선교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러시아행을 택한 건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함께 중국선교를 준비하던 남일우 선교사를 만나 러시아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게 계기가 됐습니다. 그는 제게 예상외의 제안을 했습니다. “먼저 개방된 러시아로 들어가서 사역하자. 이후 중국선교의 문이 더 열리면 들어가서 선교하면 되지 않을까. 중국은 선교사 이름으로 못 들어가도 러시아는 종교비자가 있잖아.” 저는 그의 생각에 동의했습니다.
알고 보니 남 선교사는 나를 만나기 이전부터 러시아 선교를 위해 언어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또 소련선교회에서 예비선교사로 영입이 돼 파송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안내를 받아 소련선교회를 찾았습니다. 서울 동교동 근처에 자리한 소련선교회는 한적한 곳에 있어선지 간판조차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대표인 김영국 장로는 회사 입사 면접처럼 깐깐하게 질문하셨습니다. 그는 제게 ‘러시아 선교에 대한 소명은 언제 갖게 됐나’ ‘살기 힘든 지역인데 가서 어떻게 선교를 감당하겠는가’ 등을 물었습니다.
답변은 자신 있게 했지만 김 대표는 확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러시아 선교사로 영입이 안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선교회는 몇 주 후 면담 시간을 다시 잡았습니다. 그동안 저는 러시아 선교에 대한 부르심을 깊이 고민했습니다. 면담 때 김 대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광배 목사님. 선교회 이사회에서 목사님을 선교사 후보생으로 받기로 했습니다. 선교지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입니다. 러시아어와 선교지 연구를 열심히 하시고, 파송교회를 결정하십시오.”
그 순간, 전기에 감전이 된 듯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선교라는 미지의 험로를 걸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새로운 문화와 환경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을까요. 두려움과 담대함이 교차하던 순간이었습니다.
선교지가 결정되고 오래지 않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른 선교사가 가길 희망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기꺼이 선교지를 양보했습니다. 그러자 선교회는 블라디보스토크보다 작지만 산업 항구로 외국인 출입이 빈번했던 나홋카를 선교지로 다시 지정해 줬습니다. 당시 전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이고 도시이기에 어디를 가든 상관없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23년이 지나 돌이켜 보니 이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한인이 전혀 없는 나홋카에서 사역했기에 한인교회가 아닌 현지인 선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또 현지인과 함께 지내며 선교지에서 가장 큰 무기인 언어를 비교적 빠르고 쉽게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난 그곳에 가겠느냐?
선교사 파송을 앞두고 훈련을 받던 91년 8월, 모스크바에서 국회 건물이 탱크에 부서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난 것입니다. 파송 예배를 앞두고 이런 사건이 일어나니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이래도 선교지에 가겠느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선교훈련생 5명은 “하나님께서 선교를 위한 마음 상태를 점검하시는 것”이라며 “선교지에 입국할 수 있다면 파송식을 강행하자”고 결의했습니다. 파송예배는 공산권 지역에 오랫동안 방송을 송출한 극동방송 강당에서 드리기로 했습니다.
◇박광배 선교사 약력 △1958년 경북 예천 출생 △86년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2009년 미국 리폼드 신학교 박사 △91년 소련선교회 파송으로 러시아 연해주 나홋카 현지인 사역 시작 △91년 나홋카예수사랑교회 설립 후 로마노브카, 프랄로브카를 비롯한 연해주 농촌지역 5곳에 개척교회 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