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경쟁자 점수 깎기·동료 작품 훼손·커닝 제보… 절박한 계절학기 치졸한 부정행위 몸살

입력 2014-01-25 01:33


20점 만점에 3점.

망쳤다고 생각은 했지만 믿을 수 없는 점수였다. 계절학기 ‘일반물리학’ 기말고사 시험지를 돌려받은 대학생 이모(26)씨는 충격에 빠졌다. 학점의 20% 비중을 차지하는 시험이었다.

이씨뿐이 아니었다. “성적에 불만이 있으면 수업 후 남으라”는 교수의 말에 수강생 절반이 남았다. 교수와 한 문제씩 다시 채점한 이씨 점수는 11점이었다. 부분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문제가 전부 0점 처리돼 있었다.

원인은 학생들끼리 시험지를 바꿔 채점토록 한 데 있었다. 학점 경쟁을 벌이는 ‘익명의 채점자’들이 서로 점수를 깎아내린 것이다. 이씨는 24일 “매일 얼굴을 보는 같은 과 친구들이라 더 씁쓸했다”며 “계절학기는 졸업 학점이 부족하거나 재수강을 하는 학생들이 듣는 까닭에 경쟁이 유독 치열하다”고 말했다.

20대를 짓누르는 취업 ‘무한경쟁’ 탓에 대학가가 부정행위로 물들고 있다. 지난 연말엔 해킹 프로그램까지 동원해 시험문제를 빼내온 연세대 로스쿨생과 ‘몰카’를 설치해 시험문제를 입수하려던 제주대 수의학과생 등의 부정행위가 잇따라 드러났다.

대학마다 주요 시험 후에는 수강생들의 비리를 제기하는 ‘투서’가 횡행한다. 같은 과 학생의 실기평가 작품을 훼손하는 일이 잇따르자 밤을 새우며 지키는 진풍경까지 나타나고 있다.

서울의 한 사립대 도예과에서는 실습 평가를 앞두고 밤마다 학생들이 자신이 만든 도자기 앞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자리를 비우면 누군가 작품을 깨뜨리는 일이 잇따르자 생긴 풍경이다. 졸업을 앞둔 08학번 김모(25·여)씨는 “한 학기를 공들인 작품을 망치면 평가도 평가지만 한 학기에만 200만원 가까이 되는 재료비가 순식간에 날아간다”며 “일부 나쁜 학생들 때문에 많은 친구들이 집에도 못 가고 잠을 설쳤다”고 전했다.

시험마다 나타나는 ‘커닝’도 고질병이다. 시험 직후 ‘누가, 어디서, 어떻게 커닝을 했다’는 투서가 교수들에게 빗발친다. 지난해 12월 서울의 유명 사립대에서는 전공필수과목 시험 중 미리 준비한 답안지로 바꿔치기했던 학생이 0점을 받았다. 그는 연필로 주요 내용을 답안지에 적어둔 뒤 조교가 한눈파는 틈을 타 바꿔쳤지만 이를 지켜본 다른 학생이 신고해 적발됐다.

교수들의 고민도 깊어졌다. 학생들이 서로 부정행위를 고발하면서 면학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경우는 다반사다. 부정행위 처벌 수위를 둘러싸고 교수들 사이에 의견이 달라 애를 먹기도 한다. 자신의 성적보다도 학우의 부정행위 처벌 수위에 더 큰 관심을 갖는 학생들도 있다.

강의 10년째라는 한 교수는 성적 문제로 찾아오는 학생들이 두렵다고 했다. 그는 “예전에는 학생들이 주로 어떤 이유로 해당 점수를 받게 됐는지 시험이나 과제물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받으러 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성적 자체에 대해 항의하거나 애원하는 경우가 많아 난감하다”고 말했다. 다른 교수는 “수업이나 공부보다 학점에 연연하는 풍토가 안타깝다”고 했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