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담론’ 지상 좌담] “우리 사회도 ‘준비된 죽음교육’ 해야”

입력 2014-01-25 01:36 수정 2014-01-25 16:09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와 행복발전소 하이패밀리가 공동으로 웰리빙 스쿨 ‘세이레의 기적(奇蹟)’ 세미나(2월 10~11일, 서초 사랑의교회)를 개최한다. ‘임종영성, 그 시작과 끝’이란 주제로 7명의 강사가 죽음의 담론, 임종의 영성, 임종환자를 위한 의료·심리이해·법률상식·유가족 돌봄 등에 대해 강연한다.

이에 앞서 23일 서울 송파구 하이패밀리에서 주 강사로 참여하는 송길원(하이패밀리 대표) 목사, 정진홍(서울대 종교학과) 박사, 전세일(차의과학대 통합의학대학원장) 박사가 ‘죽음에 대한 담론’을 주제로 지상 좌담을 가졌다.

-최근 ‘죽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그동안 기피하던 주제가 수면위로 부상하게 된 사회적 현상이나 배경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정진홍 박사(이하 정)=의학의 발전, 생활의 향상 등으로 기대수명이 길어졌다. 그러나 길어진 수명이 양질의 삶의 연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연명(延命)’으로 묘사되는 ‘유예된 죽음’이 말년의 삶을 ‘길어진 고통’이게 하고 있음을 사람들은 실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삶보다 더 혹독한 ‘죽음과정’을 이제는 누구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전세일 박사(이하 전)=21세기를 학자들이 4D의 시대 즉, Digital(정보화), DNA(생명과학), Design(디자인), Divinity(영성)의 시대라고 특징 지웠던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건강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육체적, 정신적, 사회 심리적 건강뿐만 아니라 영적 건강까지도 포함시킨다는 사실,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통합의학의 교육 콘텐츠 안에는 임종영성학(Thanatology)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송길원 목사(이하 송)=소득수준이 2만 달러를 넘어서면서 라이프스타일에 변화가 오고 있다. 성공만을 향해 질주하던 삶에 변화가 왔다. ‘성공이 아닌 성찰’을, ‘추월이 아닌 초월’을 지향하게 됐다. 이는 영성시대의 개막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영성하면 기독교인들은 종종 기도의 영성만을 떠올리기가 쉽다. 하지만 언어의 영성이 있는가 하면 이미지 영성이 있고 사막의 영성이 있는가 하면 유머의 영성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임종의 영성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영성시대의 특징을 드러낸 아이콘이 ‘죽음’이다.

-‘죽음’에 대해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는가. 의사, 종교학자, 목사의 입장에서 말해달라.

△전=우선 일반적인 죽음, 상식적인 죽음을 일단 기본적 죽음으로 정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목숨이 붙어있는 사람이 산 사람이다. 첫 숨을 들이쉬기 시작해서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가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 이외의 모든 현상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과 관계된 현상’들이라 봐야 한다. 덜된 사람, 태어날 사람, 죽은 사람, 다시 살아난 사람, 또 태어날 사람, 딴 세상 간 사람 등….

△정=일반적으로 말하면 몸의 종언이 초래하는 생명의 소멸이다. 그래서 죽음은 좌절로, 절망으로, 허무로 경험된다. 그러나 죽음이 생명이 지닌 불가피한 종국이라면 동시에 그것은 삶이 마무리되는 계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대체로 인류의 종교문화는 죽음을 삶을 총체적으로 추스르는 ‘완결의 고비’로 여긴다. 죽음은 끝이거나 무화(無化)의 계기가 아니라 ‘존재양태의 변화의 계기’로 여기는 것이다.

△송=이런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은 20에 죽었는데 장례식은 70에 치른다’ 참 무서운 말로 들렸다. ‘성경에 죽은 자 같으나 산 자’란 표현이 있는데 거꾸로 ‘산 자 같으나 죽은 자’들이 많다. 기독교에서 죽음은 단지 육체적 호흡이 끊기는 것을 넘어선 영적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추수되지 않은 벼는 그 자체가 저주이듯이 죽음 그 자체가 축복이라고 본다. 나아가 삶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성공과 실패, 사랑과 미움도 비로소 죽음 앞에서 화해하지 않는가? 때문에 죽음은 하나님의 완전한 치유라고 할 수 있다.

-우리사회에 웰빙 열풍이 아니라 광풍이 불더니 웰다잉이 조용히 스며들고 있다. 과연 좋은 죽음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

△정=잘 죽는다는 것은 잘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마저 의미 있는 것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말한다. 초조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으면서 죽음을 맞는 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죽음을 영원한 평화로 맞는 일, 용서하고 용서받으면서 온갖 무게를 덜어놓고 죽음을 맞는 일, 죽음자리가 지저분하지 않도록 맑고 깨끗한 흔적을 남기며 죽음을 맞는 일,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죽음을 맞는 일 등이 잘 죽는 것 아닐까.

△송=방금 정박사 말씀에 한마디 보태자면 좋은 죽음이란 준비된 죽음이 아닌가 한다. 모든 생명체들은 태어날 때 자신은 울고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세상 떠날 때, 자신은 웃고 모든 사람들이 울고 있으면 그게 좋은 죽음이 아닐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죽음을 생각해 본다. ‘내 생애 마지막 선행’이라고 해야할까? 북한 여성들을 위한 위생대, 아프리카에 모기장 보내기, 우물파주기…. 조의금의 일부를 통일기금으로 내 놓는 등 내 생애 마지막 기부가 이뤄져 함께 잘 사는 사회를 꿈꾼다면 좋은 죽음이라 여긴다.

△전=백번 동의한다. 어떠한 죽음이든 그 죽음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이타적’일수록 좋을 것이다. 나아가 살아 있는 것은 다 죽는다. 살아가고 있는 것(Living)은 다 죽어가고 있는 것(Dying)이고, 죽어가고 있는 것은 다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 것과 죽어가고 있는 것은 생명체 안에만 존재하는 현상이고 함께 동시에 진행되는 현상이다. 웰비잉(Well Being)은 웰리빙(Well Living)과 웰다잉(Well Dying)이 합쳐진 개념이다. 따라서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만이 이 생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준비된 죽음을 도울 수 있는 즉, 죽음교육이 이제 우리사회에도 자리잡아야 하지 않나.

△송=당연하다. 죽는 것에 준비된 사람은 사는 것에도 준비되었다는 말이 있다.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 치유와 회복, 천국에 대한 소망과 생의 마무리를 깨우쳐 주어야 한다. 마치 결혼예비학교가 있듯이 천국준비교실이 필요하다. 하이패밀리에서는 이런 점에서 부활절을 앞두고 고난주간에 교회가 할 수 있는 임종영성 교육을 개발했다. ‘세이레의 奇籍’이란 주제로 2월 10, 11일 양일간 전국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국교회에 제대로 된 죽음교육을 시도하려 한다. 그러면 부활절의 의미가 남달라지지 않겠나.

△전=죽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확실히 지금의 삶을 어떻게 살지에 대한 지혜를 터득하고, 이 생의 마지막 단계를 어떻게 아름답게 마무리할지를 준비하는 모습을 관찰 할 수 있었다. 죽음교육을 전 국민 교육운동으로 확산시킨다면 온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행복지수 향상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본다.

△정=죽음은 누구나 예상하며 예감한다. 죽으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죽음을 긍정적인 현상으로 수용하는지 부정적인 현상으로 치부하는지 하는 태도가 죽음이해를 달리하게 한다. 그런데 자연스러운 죽음을 긍정적으로 승인하도록 하지 않으면 그러한 주체들이 넘치는 사회는 우울하고 자포자기적이고 때로는 자학적인 풍토가 만연될 수 있다. 그러므로 죽음이 삶을 완성할 수 있는 계기라는 긍정적인 죽음관을 문화화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교육이 절실한 시점이다.

-그렇다면 본인들은 죽음에 대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덧붙여서 본인이 삶의 현장에서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죽음을 이야기해달라.

△정=죽음준비라면 마음의 무게, 살림의 무게 등을 가볍게 하고자 하는 것이 제 죽음준비의 모든 것이다. 요즘은 자연스러운 임종이 거의 없다. 의식을 잃은 채 연명을 지속하는 ‘기계적인 정황’ 속에서 임종을 맞는다. 그래도 의식이 없어지기 전에 많은 분들이 미소를 머금고 감사하다고 하면서 자기를 마무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 임종이 너무 부럽다.

△전=저는 의사로서 많은 죽음을 지켜본 사람 중의 하나다. 가장 인상깊었다고나 할까…. 사랑하는 아내 품에 안겨 즐겨 부르던 찬송가를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은 말기 암 환자가 마음속에 지워지지를 않는다. 그런 죽음을 늘 지켜본 나 자신은 죽음이 그다지 두렵지는 않다. 그저 죽음에 대해서 늘 긍정적으로 의식하며 살고 있고, 이런 생각 때문에 매 순간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고 이 세상 아름다움에 감격하며 살아가고 있다.

△송=저는 솔직히 정 교수가 어느 강의 장소에서 본인의 호스피스 봉사 이야기를 하면서 성직자들은 곱고 우아하게 죽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하더라는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고 엉엉 울고 싶었다. 그 날 이후 제 삶의 슬로건을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떠날 것처럼 사랑하며 살자’고 정했다. 그랬더니 정말 죽음이 두렵지 않고 사도바울의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더라. 제가 지켜본 가장 멋있는 죽음은 죽음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 고 채명신 장군이 아닐까 싶다. 장군묘역을 거부하고 사병 옆에 잠든 죽음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 참에 목회자들에게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서슴없이 한 마디 해 달라.

△전=사후세계-하늘나라-는 영적 세계다. 현재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도 육신을 가졌지만 역시 영적 존재다. 우리에게도 사후세계가 아니라 현세에서도 영적 체험을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제시하고 가르쳐 줬으면 한다. 무엇보다 죽음이 하나도 두려운 게 아니란 걸 확신시켜 달라.

△정=죽음과 삶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하지 않았으면 한다. 삶 속에 죽음이(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삶), 죽음 속에 삶이 스며있다는 사실(용서받고 구원받은 부활하는 삶), 그래서 그것을 총체적으로 관조하고 만나는 눈을 가지도록 신도들을 가르쳐 줬으면 한다. 그 둘을 아울러 지닐 수 없다면 그것은 ‘구원의 현실성’을 충분히 인지하도록 하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송=저는 목회자가 목회자에게 건네는 말이 되겠다. 애벌레가 세상의 끝이라 말하는 것을 우리는 나비라 부르지 않나? 죽음이 끝이 아닌, 그래서 한글이 그렇듯 ‘끄트머리’의 교육이 너무 중요하다고 본다. 끝에서 시작을 보는….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목회자들이 부활신앙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만 죽음교육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기 위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 중요한 시기다. 이번 고난주간이 이런 생명교육으로 전환하는 기회이기를 기도하고 있다.

-장시간 감사하다. 많은 도움이 됐다. 이 좌담을 통해 한국교회에도 죽음의 담론이 보다 활발해 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정리=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

죽음교육에 대한 정진홍 교수의 쓴 소리

# 죽음은 인간이 유한한 존재임을 인간으로 하여금 자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게으르거나 핑계대거나 불성실하게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우리의 삶은 ‘지금 여기’에서 ‘결정’된다. 결국 죽음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며,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긴장감을 수반한 ‘책임주체’임을 어떤 것보다도 명료하게 전해준다.

# 죽음교육이 없다기보다 오히려 그것이 새로운 ‘유행’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염려된다. 물론 어떤 것도 두드러진 주제로 선택되어 부각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을 따로 떼어내어 마치 깃발을 휘두르듯 죽음교육을 하는 일은 죽음을 역설적으로 값싸게 할 수 있다. 삶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성찰하는 그러한 ‘삶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굳이 죽음교육을 분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교육이 그 나름으로 펼쳐져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지지하고 싶다. 삶이 너무 황폐하게 ‘살고 싶은 욕망’으로만 가득 차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교육을 종교만이, 의학만이, 법학만이, 철학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각기의 영역에서 불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 모두가 함께 고뇌해야 한다는 것을 죽음교육에 조언하고 싶다.

# 오늘의 의료현실을 감안할 때 무의미한 생명연장의 현실 속에서 존엄사를 승인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죽어가는 사람의 존엄을 위해서도 그렇고 그를 보살피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해도 그렇다. 하지만 죽음의 자기 결정권을 법률로 허락하는 것과 그러한 희구의 현실성에 공감하는 것과는 다르다. 회복불가능하다는 판정 이후에 본인의 사전의향서, 곧 연명을 위한 치료가 아니라 통증완화치료만을 바라는 것은 존중할 필요가 있겠지만 존엄사법의 제정은 법을 빙자한 살인의 현실성을 간과할 수 없는 한, 더 많은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