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은 푸르고 속은 노랗다는 배추에 관한 상식이 깨졌다. 붉은색을 띠는 ‘홍배추’가 개발됐기 때문이다. 홍배추의 겉잎은 검붉은 색을 띠고 속은 순무와 같은 자주색이다. 보쌈과 백김치 등의 재료로 사용하면 아름다운 자주색으로 밥상을 수놓고 베타카로틴, 안토시아닌 등 기능성 성분도 많이 함유하고 있어 항산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한다.
기능성 채소를 연구하는 ‘쌈추 박사’ 이관호(59) 한국농수산대학 교수가 또다시 신품종 개발에 성공했다. 이 교수는 최근 한 종묘회사와 기술이전 협약을 맺고 홍배추 상품화에 나섰다고 24일 밝혔다.
현재 국내에서 유통 중인 붉은색 채소는 적무, 아마란스, 비트 등 극소수에 그치고 있다. 대부분 종자를 수입하거나 로열티를 지불하는 상황이다. 이 교수가 개발한 붉은 채소 시리즈가 상업화에 성공하면 농가소득 증대와 수입 대체 효과를 거두는 동시에 주요국으로 수출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배추 소비량이 많은 중국과 베트남은 잠재적인 수요가 충분한 것으로 기대된다.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에 위치한 한국농수산대학에는 이 교수가 지은 연구용 비닐하우스가 여러 동 있다. 1997년 개교와 함께 부임한 이 교수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같이 출근해 정성을 들인 곳이다. 이 교수는 일본 유학시절인 1986년부터 10여년 동안 연구에 매달린 끝에 배추와 양배추를 교잡해 새로운 품종인 쌈추를 개발했다. 배추와 양배추는 염색체 개수가 서로 달라 교잡을 하더라도 안정적인 후대 생산이 어렵지만 이 교수는 배배양 등의 기술을 동원해 고유의 특성이 후대로 전해지는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 냈다. 쌈추는 2000년 시장에 나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 교수는 ‘쌈추 박사’로 농업계에 이름을 알리게 됐다.
쌈추는 언뜻 보면 봄동 배추와 비슷하지만 잎이 부채처럼 동그랗다. 배추의 쌉쌀하고 약간 매운맛과 양배추의 고소하고 단 맛이 함께 어우러져 매우 새콤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쌈추는 상추보다 칼슘 성분이 5배, 비타민A가 2~3배, 비타민C는 12배 정도 많이 들어 있어 영양이 뛰어나다고 한다.
이 교수는 쌈추를 시험 재배하던 농가에서 “참 맛있는데 붉은색은 안 나오냐”는 말을 듣고 붉은 채소 개발에 눈을 돌리게 됐다고 한다. 이후 대규모 시험 재배 농가를 둘러보던 중 돌연변이로 인해 붉은 색을 나타내는 쌈추 모종이 눈에 띄었다. 일반인의 눈에는 잡초로 비쳤을 수도 있지만 이 교수에겐 기회의 실마리였다. 이 돌연변이 모종을 가져다가 집중적으로 육종한 끝에 붉은색을 띠는 쌈추 품종을 확립할 수 있었다. ‘홍쌈추’의 등장이었다.
이후 이 교수는 붉은색이 도는 청경채인 ‘홍경채’, 케일에 붉은색을 발현시킨 ‘로얄채’, 노란꽃 대신 신비로운 자주색 꽃을 피우는 ‘청유채’ 등을 연이어 개발해 특허를 받았다. 이 교수 스스로 ‘쌈채소의 지존’이라고 부르는 ‘쌈그라’도 탄생했다. 각종 영양 성분이 매우 뛰어나고 즙액이 많고 쌈을 입에 넣었을 때 살살 녹아내리는 듯한 식감이 일품이라는 설명이다. 이날 연구용 비닐하우스에서 기르고 있는 쌈그라 잎을 떼어 조금 씹어 보니 고소한 향이 입안 가득 퍼지는 풍미를 맛볼 수 있었다.
비닐하우스로 초대를 받은 학교 관계자들은 삼겹살을 쌈그라에 싸서 먹어보고는 “이런 맛을 내는 채소도 있었습니까”라며 천상의 맛이라고 극찬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일반 소비자들은 이 교수가 개발한 쌈추·홍배추 등 기능성 채소를 아직은 구매할 수 없다. 쌈추는 2000년 잠깐 시판을 했지만 특허 등록 등 계약관계에 문제가 생겨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후 이 교수가 연구에만 몰두하면서 신품종들이 줄줄이 태어났지만 출시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동안 마땅한 유통 경로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홍배추는 기술이전을 통해 내년 하반기쯤 시중에 판매될 예정이다. 나머지 기능성 채소들도 최근 유통을 돕겠다고 나선 사업가가 있어 이르면 올 봄부터 순차적으로 시장에 선을 보일 예정이다. 이 교수는 “쌈추 연구소가 하나 생겨서 뜻있는 연구자들을 모아 국민 식탁에 맛있는 채소를 올리고 로열티도 벌어들이고 싶다”며 “이런 게 바로 창조경제의 표본 아니겠느냐”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화성=선정수 기자 jsun@kmib.co.kr
[어! 배추가 붉은색이네] 맛좋고 영양만점 ‘홍배추’ 드실래요
입력 2014-01-25 02:31 수정 2014-01-25 1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