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해 보이는 삶 너머 불확실한 것들에 대한 깨달음

입력 2014-01-24 01:32


스페인 최고봉 마리아스 대표작/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하비에르 마리아스(63).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스페인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독일의 유명한 문학평론가인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그를 일컬어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이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비견되는 작가”라고 평했다. 흔히 ‘철학소설’ 혹은 ‘형이상학적 스릴러’로 불리는 그의 대표작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문학과지성사)는 확실해 보이는 삶 너머의 불확실성과 불확정적인 것들에 대한 깨달음을 전한다.

대필 작가인 빅토르는 이제 막 알게 된 여인 마르타와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그녀의 집을 찾는다. 그러나 사랑을 나누기 직전 마르타는 원인 모를 고통을 호소하다 반쯤 벌거벗은 채 숨을 거둔다. 빅토르는 어찌할 바를 몰라 혼란스럽다. 그녀의 남편 데안은 영국 출장 중이고 옆방에는 그녀의 두 살배기 아들이 잠들어 있다. 아이의 방에 있는 장난감 비행기 모빌을 쳐다보는 빅토르가 하나의 상황 속에 담긴 이중적 의미를 파헤치는 장면은 압권이다. “그것은 마치 아이의 머리와 몸 위에서 불가능한 환상을 꿈꾸며 느릿느릿 굼뜨게 야간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아이와 아빠와 마르타가 마침내 잠이 들고 각자 다른 두 사람의 소중함을 꿈꾸는 동안, 아마도 그런 전투는 이미 과거에 여러 번 치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런 대목을 떠올렸다.”(41쪽)

빅토르는 자신의 흔적을 지운 뒤 그곳을 떠나고 마르타의 가족은 그녀가 죽을 때 혼자가 아니었음을 눈치 챈다. 한 달 뒤 빅토르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마르타 가족에게 접근해 함께 점심 식사를 하게 되고, 식사 후 마르타의 여동생 루이사를 쫓아가다가 마르타의 아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아이가 그를 알아보고 그의 이름을 부르자 빅토르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제 빅토르는 더 이상 비밀이나 미스터리를 간직하기 않기 위해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한다. “나는 당황했다. 냉동고의 문의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얼굴을 휩쌌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 얼굴도 빨개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그녀 앞에서 더 이상 내 행동을 위장하거나 비밀스럽게 행동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오히려 나는 기분이 좋았고 편안했다.”(344쪽)

결국 마르타의 남편 데안도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는데…. 과연 데안은 어떤 행동을 취할까. 자기 아내의 죽음이 빅토르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에게 복수할 것인가. 소설의 극적인 반전은 오히려 데안이 빅토르에게 자신의 행적을 고백하는 대목에 있다. “난 런던에 혼자 있지 않았소. 1년 전부터 애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이 근처에 있는 ‘라루스’ 병원에서 일하는 젊은 간호사요.”(439쪽)

데안 역시 자기가 런던에 있었을 때 일어났던 사고에 대한 비밀을 간직하기에 지쳤던 것이다. 데안은 애인 에바의 낙태 수술을 하기 위해 런던으로 갔으나 에바의 임신은 빅토르를 붙잡기 위한 거짓말이었고, 그녀는 런던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던 것이다.

끝까지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었던 빅토르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것이나, 빅토르와 대면한 데안이 자신의 치부를 털어놓는 고백은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인간 존재의 본성적인 굴레를 드러낸다. 이 소설을 비롯, 마리아스의 작품들이 철학소설로 불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1995년 남미의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로물로 가예고스 문학상 수상작. 송병선 옮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