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명희] 탐욕이 부른 신용대란

입력 2014-01-24 01:35 수정 2014-01-24 10:26


“개인정보 유출은 살인만큼 무서운 범죄… 신뢰가 붕괴된 사회는 존립 못한다”

어느 날 내 존재를 증명해줄 여권과 신용카드, 개인정보가 모두 사라진다. 휴가지에서 돌아와 보니 차도 없어졌고 집은 매물로 나와 있다. 경찰 전산망에 나는 매춘과 마약 전과자로 바뀌어 있다.

1995년에 만들어진 샌드라 불럭 주연의 영화 ‘네트’는 첨단 정보시대에 개인정보가 얼마나 쉽게 지워지고 조작될 수 있는지를 섬뜩하게 보여준다. 컴퓨터 프로그래머 안젤라는 동료가 보낸 음악용 소프트웨어를 분석하다 미국 연방정부의 극비 데이터베이스 가 담겨 있는 것을 알게 되면서 범죄 조직에 쫓긴다. 그녀를 만나러 오던 동료는 컴퓨터 조작으로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한다. 그녀를 도와주던 의사는 페니실린 알레르기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컴퓨터 기록이 당뇨병 환자로 조작되는 바람에 약물사고로 죽는다. 범죄 조직의 보안 프로그램 승인을 거부하던 국방부 차관은 조작된 컴퓨터 진료기록에 의해 자신이 에이즈에 걸린 줄 알고 자살한다.

영화 속 얘기만은 아니다. 개인정보가 범죄 집단 손아귀에 들어가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이다. 최근 KB국민·NH농협·롯데카드에서 일어난 개인정보 유출 사건은 정보보안에 무감각한 우리 사회에 울리는 경종이다.

외부 회사 직원 한 명이 USB에 1억400만건의 개인정보를 복사해 유유히 빠져나와 돈을 받고 팔아넘기고, 창원지검이 불법 사금융 업자와 불법 대출광고 업체들을 수사하면서 정보유출 사실을 밝혀낼 때까지 카드사들은 최대 1년이 넘도록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들 회사만의 문제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정보가 어디선가 떠돌아다니고 있을지 모른다. 해킹에 의한 정보유출만 걱정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내부 직원이 정보를 팔아넘긴 2011년 삼성카드나 이번 사건처럼 열쇠를 가진 사람이 버젓이 금고 문을 열고 도둑질하는 형국이니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정보가 돈이 되는 세상이다. 카드사와 은행, 보험사, 통신사, 백화점, 영화사, 정유사, 인터넷 업체 등 우리가 이용하는 모든 업체들은 주민등록번호와 집 주소, 휴대전화번호, 은행 계좌번호는 기본이고 결혼했는지, 자녀는 몇 명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방대한 정보들을 수집한다. 업체들은 수집한 정보를 계열사로 넘기고, 다른 회사에 팔면서 돈 버는 데 열중했다. 조지 오웰이 예언한 ‘빅 브라더’들이 곳곳에 널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엿보고 있다. 어떤 음식점에 자주 가는지, 어떤 영화를 자주 보는지 개인의 취향과 소비 패턴을 분석한다. 빅데이터를 활용해 개개인에게 맞춤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정보통신기술 발달로 우리는 편리함을 얻은 대신 소중한 인권을 잃었다. 참 피곤한 나라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은행이나 보험사의 대출 권유 전화를 받아야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스팸 문자에 시달려야 한다. 왜 돌잔치 초청 문자메시지를 확인하면서 은행 통장에 있는 돈이 빠져나가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지경이 됐을까.

카드사 잘못으로 내 정보가 유출됐는데도 소비자들이 나서서 직접 해결해야 한다. 경제부총리라는 사람은 “금융소비자도 정보를 제공하는 단계에서부터 신중해야 한다. 우리가 다 정보 제공에 동의해줬지 않느냐”고 질타한다. 정보 제공에 동의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아 아예 가입이 안 된다는 것을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인지 궁금하다.

카드사 임원들이 대거 사표를 내고 정부가 뒷북 대책을 발표했지만 한번 무너진 국민들의 신뢰가 쉽게 회복될 것 같진 않다. 야당 대표가 “개인정보 유출은 살인만큼 무서운 범죄”라고 했지만 금융사나 정책 당국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신뢰가 붕괴된 사회는 위험하다. 소비자들이 업체들이 요구하는 대로 시시콜콜한 개인정보를 다 적은 것은 적어도 내 정보들이 안전하게 관리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믿음이 깨졌을 때 선택은 모든 것을 끊고 불편한 시대로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