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한민수] 타도대상 vs 애국자
입력 2014-01-23 01:34
“검사 시절 재벌은 타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대단한 애국자더군요” 특수부 검사 출신으로 국내 최대 기업에 영입된 A씨는 그룹 2인자 주재로 핵심 임원들만 모인 신년하례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덕담을 나누기 위해 모인 자리는 순간 얼어붙었다. 10년도 더 됐지만 당시 자리에 참석했던 B씨는 “특수부 검사들에게 재벌은 때려잡아야 할 대상이었다는 그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술회했다.
재벌에 대한 이분법적 시각
2014년 대한민국의 재벌은 타도의 대상인가, 아니면 애국자인가? 얼마 전 총수가 검찰 수사를 받던 대기업 임원 C씨가 국민일보를 찾았다. 그에게 “회장이 구속까지 되진 않을 것 같다”고 덕담 겸 위로를 건넸더니 “산업부는 그리 말씀하는데, 사회부는 많이 달라요”라는 대꾸가 곧바로 돌아왔다. 기업을 상대하는 산업부와 달리 검찰을 취재하는 사회부에서는 ‘회장은 구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는 것이다.
우리의 위정자(爲政者)들은 해외만 나갔다 오면 기업인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곤 했다. 대선 후보를 지낸 유력 정치인 D씨. 그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미국에 짓고 있는 공장을 다녀온 뒤 그 규모에 감탄한 표정을 한동안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그 회사 주식을 사라고 권유하기까지 했다.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집권 초 재벌이라면 고개를 젓던 대통령이 해외순방을 다녀온 뒤 기업인을 바라보는 눈길이 변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삼성은 이미 외국인들에게 대한민국 하면 떠오르는 1위 이미지로 굳어졌다. 그럼 재벌은 애국자인가?
현재 구속·수감중이거나 구속집행이 정지된 재벌 오너는 SK그룹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CJ그룹 이재현 회장, 태광그룹 이호진 전 회장과 이선애 전 상무, LIG그룹 구자원 회장과 구본상 부회장, 동양그룹 현재현 회장 등이다.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과 금호석유화학 박찬구 회장은 불구속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대부분 회삿돈을 횡령했거나, 개인 돈처럼 유용한 혐의다. 서슬 퍼런 특수부 검사들이 추상 같은 구형을 하면, 과거 집행유예를 주로 선고했던 판사들은 법정구속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대기업들이 사회공헌으로 쓴 3조2494억원(2012년 전경련 집계)은 효과를 낼 수 없다. 실제 지난해 7월 한 설문조사에서 사회공헌활동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응답자들의 80.1%는 그 이유로 ‘기업들의 생색내기용’을 꼽았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한국사회에서 재벌을 ‘타도 대상 아니면 애국자’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극단적인 이분법 프레임에 속한다. 이른바 흑백 논리다.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적(敵)이라는 얘기다.
냉정하게 보면 재벌은 애국(愛國)을 하기 위해 기업을 운영하는 게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다. 오너들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을 쓰러뜨리겠다며 칼을 휘두르는 특수부 검사야말로 타도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기회만 되면 검사 출신을 거액을 들여 영입하고 ‘길들이기’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재벌들 하기에 달려있다
문제는 재벌들이 이 돈을 ‘정당’하게 벌었고, 제대로 쓰고 있느냐는 데에 있다. 상당수 대기업은 분명 국민들의 ‘희생’을 토대로 급성장했다. 권위주의 정권은 교육과 복지에 들어갈 엄청난 자금을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재벌들에게 특혜로 줬다. 그 돈을 갖고 내부거래와 일감몰아주기를 하며 공정치 못하게 회사를 키워 왔다. 수십조∼수백조원에 달하는 회사를 자녀들에게 헐값에 넘겨주고 회삿돈을 주머니 속 쌈짓돈처럼 꺼내 쓰는 재벌을 보며 화가 치미는 국민이 비단 특수부 검사들뿐이겠는가.
다시 한번 묻는다. 재벌은 타도 대상인가, 애국자인가. 결국 모든 게 그들 하기에 달렸다.
한민수 산업부장 ms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