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병권] 어진 신하
입력 2014-01-23 01:34
백제가 멸망할 무렵 나라 안에는 충신열사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사가 성충(成忠). 좌평(佐平)으로 있을 때 왕이 신라와의 싸움에서 잇따라 이겨 자만에 빠지자 국운이 위태로워짐을 극간하다 투옥됐다. 옥중 단식 중 죽음 직전에도 왕에게 글을 올렸다. 신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법을 간했지만 왕은 이를 무시해 결국 백제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흥수(興首), 계백(階伯)과 함께 부여 삼충사에 잠들어 있다.
백제를 무너뜨리고 3국통일의 기초를 세운 무열왕도 충신이 적지 않았다. 김유신을 비롯해 알천공 등 7명이 무리를 이뤄 그를 왕위에 올리고 통일의 대업을 이끌게 했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칠성우(七星友)가 바로 이들이다. 김유신은 나이가 열 살이나 적은 춘추가 왕재임을 알아보고 진작부터 받들어 모셨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죽음을 불사하며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충신을 높이 평가한다. 역사에서 오래 기억에 남는 인물도 이들이다. 사육신을 비롯해 주전파였던 삼학사 등 헤아릴 수 없는 충신들이 명멸했다. 어떻게 보면 한국사는 소신과 강직으로 무장한 충신들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충신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차원이 다른 개념으로 어진 신하를 의미하는 양신(良臣)이란 것이 있다. 군주와 신하의 전범을 보인 당 태종과 위징(魏徵)사이의 대화록에 나온다. 명신이었던 위징은 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충신은 바른 말을 해 자신은 죽게 되고 군주에게는 폭군이라는 오명을 씌우는 신하이고, 양신은 자신도 세상의 칭송을 받고 군주에게는 명군이라는 영광을 얻게 하는 신하라고.
당의 거유 조유가 분류한 나라에 이로운 여섯 종류의 신하에도 양신이 포함된다. 그는 최고 수준의 신하인 성신(聖臣), 멀리 내다보면서 작은 것까지 살피는 지신(智臣), 청렴결백한 정신(貞臣), 위험을 무릅쓰고 주군의 과실을 지적하는 직신(直臣)을 충신, 양신과 더불어 ‘육정신(六正臣)’으로 규정했다.
대개 나라가 기울 때 충신들은 군주에게 목숨을 걸고 바른 말을 하지만 제대로 국정에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결국 충신이 되느냐 양신이 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군주에 달려있는 듯하다. 좀 과장하면 백제 말의 신하들은 왕 때문에 충신이 됐으며 무열왕의 칠성우는 김춘추 덕분에 양신이 됐다. 위징 본인도 태종에게 자신이 양신이 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시대를 불문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소통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말이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