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경래 (5) 박정희 의장 “월남 파병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소?”

입력 2014-01-23 01:31


월남파병 기사가 나온 날 느지막이 출근했다. 기관원 3명이 나의 팔을 이끌었다. 내가 간 곳은 이후락(1924∼2009) 공보실장의 방이었다. 최고회의 건물 안이었다. 곧이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방으로 안내됐다. 1년 전부터 출입기자로서 많은 기사를 썼지만 박 의장을 코앞에서 대면하기는 처음이었다. 그의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담배는 타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긴장됐다.

“그런 기사를 쓰려면 우리에게 미리 연락이라도 해야지. 덮어놓고 쓰면 되겠소?” 박 의장은 담배 연기를 내뿜은 뒤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 후 자리를 권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휴∼’ 한숨이 새어나왔다. “의장님, 죄송합니다. 그 기사는 국민들에게 긍지를 심어주자는 동기도 있었습니다. 한국군이 우방을 돕게 된 것은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굳었던 박 의장의 표정이 펴지는 듯했다.

“그런데 월남파병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소?” 본격적인 취조가 시작됐다. 거듭 물었지만 나는 취재원을 밝히지 않았다. “취재원을 밝힐 수 없습니다. 기자에게 그것은 생명보다 중요한 원칙입니다.” 박 의장도 지지 않았다. “내게만은 밝혀줘야지. 국가 중대사를 발설한 놈을 알아야 대책을 세울 것 아닌가?” 나는 기지를 발휘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월남대사관에서 들었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 취재원을 밝히지 않는 답이었다. 박 의장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1시간 후에야 나는 의장실을 빠져나왔다. 신문사로 돌아오자 선후배들이 박수를 쳤다. “살아왔구나.” 당시는 삼엄한 시절이었다. 매를 맞거나 모진 고문을 당할 것이라 다들 염려했던 것이다. 나는 면담 과정에서 박 의장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됐다. 소탈하고 사려 깊다고 느꼈다.

최고회의를 출입한 62년 나는 세 차례 기자실 출입정지를 당했다. 첫 번째는 월남파병 기사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정책 관련 기사 때문이라고 했지만 뚜렷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세 번째는 최고위원 전원이 국회의원으로 출마한다는 기사가 허위라며 출입정지를 통보했다. 63년 군사정부의 민정이양 문제로 정국이 시끄러웠다. 64년엔 2월부터 전국에 식량난이 왔다. 보릿고개였다.

다이어트를 위해 ‘간헐적 단식’을 하는 요즘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 약 130만 농가가 쌀 한톨 없는 농가였다. 봄 파종할 쌀도 없다는 뜻이다. 나는 5월 19일 ‘허기진 군상’이라는 제목으로 국민들의 생활상을 보도했다. 정치부장이던 나는 특별취재팀장 자격으로 시리즈 첫 기사를 작성했다. ‘술지게미 수배행렬. 하루 평균 200명…눈물이 말라 한숨으로 변해’가 제목이었다.

대전 한 양조장에 대한 르포였다. 배고픈 이들이 술을 담고 남은 곡식 찌꺼기 ‘술지게미’를 얻기 위해 줄을 선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는 술 찌꺼기로 배를 채운 아이가 교실에서 취해 쓰러진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 시리즈는 같은 달 30일 8회를 끝으로 마감했다. 계획보다 빨리 끝난 것이었다. 계엄령 선포 때문이었다.

게엄포고령 1호로 모든 언론이 군의 검열을 받게 됐다. 정부 비판이나 사회고발 성격의 기사는 보도될 수 없었다. 우리 신문 몇몇 기사가 ‘북한의 신문과 방송에 인용돼 적을 이롭게 했다’ ‘학생시위를 선동했다’ ‘정부를 비방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계엄 선포 후 구속된 1호 언론인은 우리 신문사 사장과 기자였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