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회-하반신 마비 조금임 씨] 너무도 아름다운 황혼… 평생 모은 7억 기부한 95세 장애인 할머니
입력 2014-01-22 01:34
조금임(95·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방로) 할머니는 하반신을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 혼자서는 휠체어를 타지도 못한다. 간호전문대 출신인 조 할머니는 31세 때 6·25가 터지자 간호장교로 전장에 나갔다. 그러나 타고 가던 수송차가 뒤집히는 바람에 척추 장애를 입고 하반신을 쓰지 못하게 됐다. 이로 인해 소령으로 진급하며 전역했다.
할머니는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휠체어에 의지한 채 지내왔다. 양말공장에서 일하며 어렵게 생활했다. 국가유공자로 인정돼 나라에서 연금이 나왔지만 평생 돈을 안 쓰고 살아왔다. 먹고 싶은 것도 사먹지 않고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해왔다.
조 할머니는 최근 여산장학회에 1억9500만원,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500만원 등 총 2억원을 기탁했다. 21일 여산장학회에 따르면 조 할머니는 앞서 네 차례에 걸쳐 5억원을 이 장학회에 기부했다. 평생 어렵게 모은 7억원을 모두 기부한 셈이다.
전북 완주에 있는 여산장학회는 조 할머니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조카사위인 국중하(80·우신산업 대표)씨에게 2억원을 건네 현재의 여산장학회가 출범하게 했다. 국씨는 현재 여산장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조 할머니는 이후 세 차례 1억원씩 기부한 뒤 이번에 또 2억원을 냈다. 장학회 측은 이번 기부금을 고교생과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어린이재단은 빈곤가정 어린이들의 교복 구입비로 쓸 예정이다.
조 할머니는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나가사키에서 조산간호전문대를 졸업했다. 이후 광복이 되자 귀국, 국군 창설과 함께 여군이 됐다. 허리 부상으로 전역한 뒤 누워만 있던 조 할머니는 “애국하는 방법이 전선에만 있는 게 아니다”는 생각으로 서울 대방동에 세워진 ‘재활용사촌’에 나가 일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군용 양말과 장갑을 만드는 일을 하며 한푼 두푼 모았다.
하반신을 못 쓰지만 열심히 운동해 장애인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1967년 영국에서 열린 장애인 세계탁구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카퍼레이드도 하고 우승 소식이 신문에 보도됐다. 육영수 여사는 자신이 읽던 잡지를 보내주기도 했다. 1972년엔 독일에서 개최된 장애인 올림픽 양궁 부문에서 금메달을 땄다.
조 할머니는 기자의 전화 취재에 “뭐 큰일도 아닌데 이리 알려지는 게 부담스럽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것이 조 할머니의 꿈이라는 게 여산장학회 관계자의 설명이다. 조 할머니는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부끄럽다. 작은 정성이지만 지역의 인재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중하 이사장은 “조 할머니는 만류하셨지만 아름다운 일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며 “그분의 뜻에 따라 인재를 키우는 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완주=김용권 기자 y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