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 테너 이인범 탄생 100주년] 인간의 구원 가능성을 설파하다

입력 2014-01-22 01:32


부친 이학봉 목사 평양 순교 스토리 첫 공개

올해는 재미교포 작가 김은국(Richard Kim·1932∼2009)이 장편소설 ‘순교자(원제 The Martyred)’를 펴낸 지 50년이 되는 해다. 미국 아이오와대 문예창작 석사학위 과정 졸업작품으로 제출된 이 영문 소설은 발표되자마자 미국 평단과 언론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뉴욕타임스는 이름 없는 신예의 첫 작품에 대해 “도스토옙스키와 카뮈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은 훌륭한 작품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놀라운 서평을 실었다. 미국에서 20주 연속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이 작품으로 김은국은 한국계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 소설은 남북간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넘어 신이 침묵하고 있는 시대에 인간의 구원가능성을 질문하는 묵직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 한국문단에는 2000년간 세계문학의 본류를 차지하고 있던 서양문학의 중심에 한국 청년이 뛰어들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한 소설이다. 재미있는 것은 ‘순교자’의 주인공인 신 목사의 모델이 이인범의 부친이자 김은국의 외할아버지인 이학봉 목사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인범과 김은국은 조카(누님의 아들)-외삼촌의 관계다. 이인범은 위로 누님과 남동생 인근(연극인), 인형(피아니스트·납북된 후 김일성대 교수 지냄)을 두었는데 누님 이옥현의 아들이 김은국이다. 이인범이 1939년 일본 성악콩쿠르에서 수위 입상을 함으로써 민족적 자긍심을 떨친 데 이어 그 25년 후 단신 월남해 한국전쟁 후 미국으로 간 고학생 김은국이 세계 정상급 소설을 출간함으로써 가문에 대단한 명예를 기록한 것이다.

장로교회의 중심적 목회자

평양신학교 17회 졸업생인 이학봉(1892∼1950) 목사는 평북 용천에서 목회를 하다 원산 광석동교회, 함흥 중앙교회를 거쳐 평양 남문밖교회를 담임한 평양 장로교회의 중심적인 목회자다. 용천은 당시 우리나라 기독교 서북벨트의 중심 지역으로 장기려, 함석헌, 장상(전 이화여대 총장) 같은 인물을 배출한 곳이다. 당시 선천·용천 지역에는 매퀸 선교사와 홀드 크러프트 선교사 등이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우고 복음 전도에 열정을 불태웠는데, 이들의 영향으로 소년 이인범은 피아노를 잘 다루고 뛰어난 독창 솜씨를 선보여 어려서부터 이름이 자자했다.

이학봉 목사는 설교할 때면 교회당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고 맑은 목소리를 자랑했다고 한다. 평양에서는 유일하게 수화(手話)를 할 줄 아는 목사라서 청각장애인들이 많이 출석했고, 늦은 밤에도 혼자 예배당을 울리며 설교연습을 하는 열정을 가진 목사였다. 이 목사가 북한 기독교 역사에 본격 등장한 것은 1946년 3월 1일 평양에서 발생한 3·1절 기념예배 사건이다.

북한 공산당은 평양 교회들의 3·1절 기념행사를 금지시키고 공산당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평양역전집회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으나 교회 측은 3·1운동은 기독교회 중심으로 일어난 운동이라는 점을 주장하며 교계의 기념예배를 취소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기념예배는 유서 깊은 장대현교회에서 열렸다. 이때 연행된 사람이 사회자 김길수 목사, 설교자 황은균 목사를 비롯해 김명길 김인준 김석원 박대선 이춘생 이학봉 목사(평양노회장) 등이었다. 기독교와 공산정부가 공개적으로 대립한 첫 사건이었다.

공산정권은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해 그해 11월 3일 일요일을 전국 면·군·시·도 인민위원회 위원선출을 위한 투표일로 정했다. 북한 교회들은 주일선거를 반대했다. 공산정권의 예배 방해와 목사의 설교 감시는 노골화됐다. 이학봉 목사의 친인척 중에서 가장 늦은 시기인 1947년에 남하한 김은국의 여동생 김은경 전 한양대 교수(성악가)는 당시 외할아버지가 시무하던 남문밖교회에는 비밀경찰들이 상존하며 설교를 감시했고, 걸핏하면 이학봉 목사를 연행해 갔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외할머니와 교인들은 길가에 나와 찬송가를 부르며 이 목사를 응원했다. 끌려갔던 이 목사가 돌아오면 외할머니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두루마기의 옷고름을 다는 일이었다.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경찰에서 옷고름을 제거했다는 얘기다.

당시 사위인 독립운동가 김찬도(김은국 부친)가 장인인 이 목사를 만나 함께 월남할 것을 권유했으나 이 목사는 “교인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내가 어찌 일신의 편안함을 위해 교회를 떠날 수 있느냐”며 부부가 끝내 평양을 고집했다고 한다. 김찬도는 수원고등농림학교 재학 중이던 1928년 우종휘 권영선 등과 함께 전문학교 급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항일독립운동단체 조선개척사를 설립해 농학도를 결속시키다 3년간 옥고를 치른 후 만주 용정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강원룡과 문익환 목사를 키워낸 사람이다.

공산조직인 평양기독교연맹에 목사들을 가입시키려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공산당은 48년 초 이 목사가 시무하는 남문밖교회에 평양시내 목사 장로들을 다시 소집하여 기독교 연맹 가입을 요구했다. 남문밖교회는 1903년 장대현교회에서 분립한 교회로 이학봉 목사가 3대 담임을 맡고 있었다. 북한공산당은 기독교연맹을 조직한 후 1949년에는 각도 대표로 소위 기독교도연맹 총회를 결성했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조선그리스도연맹’의 전신이다. 연맹에 가입하는 목회자들과 반대하는 목회자들이 팽팽하게 나뉘어 가고 있었다.

6·25 직전인 1950년 6월 18일 평양의 목사 14명이 비밀경찰에 연행됐다. 소설 ‘순교자’가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14명의 목회자 중 12명은 6월 25일 새벽에 처형됐다. 한 사람은 정신 이상이 돼 목숨을 유지했고, 온전하게 돌아온 한 사람의 행적이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소설의 주인공인 신 목사, 실제 이학봉 목사가 그 모델이다. 소설은 이렇게 전개된다.

살아 돌아온 신 목사는 같은 장소에 수감돼 있지 않아 12명의 처형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차츰 신 목사가 다른 목사들과 함께 수감돼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진실은 오리무중이 돼버린다. 신 목사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공산당에 부역해 살아남은 자로 몰린다. 교인들이 들고 일어나 교회를 파괴하고 신 목사에게 돌팔매질을 한다. 그럼에도 신 목사는 입을 열지 않는다.

평양에 파견된 남한의 육군특무대는 12명 순교자에 대한 추도예배를 개최해 효과적으로 공산당의 잔혹함을 알리기 위해 이 사건을 조사한다. 나중에 12명 처형을 목격한 공산군 소좌가 체포돼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공산군 소좌는 말한다.

“자, 여러분. 당신들의 위대한 순교자들이 어떻게 죽었나 알고 싶다고 했지? 꼭 개새끼들 같이 훌쩍거리고, 낑낑거리고 엉엉 울면서 죽어 갔어. 살려 달라 아우성을 치고, 자기네 신을 부정하고 동료들을 헐뜯는 꼬락서니라니. 과연 한 번 보기 좋았지. 그자들은 개처럼 죽은 거야!”

신앙인의 겸허한 자세 견지

공산군 소좌의 증언은 이어진다.

“그자(신 목사)는 유일하게 내게 대항했던 자였어. 난 당당하게 싸우는 걸 좋아해. 그자는 용기가 있었어. 내 얼굴에 침을 뱉을 만큼 배짱 있는 친구는 그자 하나뿐이었어. 그래서 그자만은 쏘지 않았던 거야. 사실은 쏘아 버렸어야 하는 건데.”

그 후 신 목사는 태도를 바꾼다. 12명 목사의 처형에 관해 자기로선 일체 아는 바 없다고 했던 그는 동료 목사들이 얼마나 굳세게 저항했는지, 모진 고문 속에서도 얼마나 당당하게 죽어갔는지를 증언하고 나선다. 물론 거짓이다. 인간의 일시적인 필요를 위하여 신앙의 순교자를 날조할 수는 없다고, 그것은 최대의 경멸을 받아 마땅할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던 신 목사가 자신이 반역자이며 죽은 12명의 동료 목사들이 순교자라고 사람들에게 설파하고 다닌다.

이 작품의 평자들은 “신 목사의 인간적인 성숙성과 신앙인으로서의 겸허한 자세가 절제 있고 지적인 문장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거니와, 신 목사가 왜 자신 스스로 반역자의 입장을 택했는지, 비겁하게 죽어간 목사들을 왜 순교자의 위치에 올려놓았는지 작품은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는 않고 있다.

신앙의 지조를 선택함으로써 살아남았고, 그러나 동료 목사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배신자의 위치를 선택하여 교인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신 목사, 그 주인공인 이학봉 목사. 남한으로 온 후손들이 전하는 그의 최후는 이렇다.

“그 후 평양과 용천에서 온 많은 월남자들을 만나 수소문했지만 할아버지(이학봉 목사)를 직접 만났다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곧바로 처형당한 것 같다.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공산당에 고분고분할 목사는 아니었기 때문에 6·25직후 순교한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 후 90년대 미국에 살던 사촌 이방은이 평양에 첼로 공연을 갔을 때 할아버지가 1950년 10월 18일 저녁 대동강변에서 처형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임순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