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 테너 이인범 탄생 100주년] 치명적 火傷딛고 한국음악사 새 장 연 불멸의 테너
입력 2014-01-22 01:38
온전한 신앙의 힘으로 역경 극복한 인생 스토리
오는 23일이 한국 성악계 최고의 테너로 꼽히는 이인범(李仁範·1914.1.23∼1973.9.13)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지만 간혹 음악 전문지나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면 한국 현대음악사에서 그를 능가할 테너는 없다는 평가를 만나게 된다. 모든 분야에서 그렇지만, 한국의 음악이 얼마나 발전했는데 일제 시대와 해방공간에서 활동한 한 성악가의 노래가 아직도 최고봉이라고 불리고 있다면 그 노래는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그의 음악은 현재 얼마나 남아 있는 것인가. 잊혀진 그의 삶은 어떤 것인가. 이런 궁금증을 갖고 이인범을 찾는 여행을 시작했다.
평북 용천의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인범은 당시 서양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을 접해 평양 숭실중학 시절부터 음악회마다 독창을 도맡다시피 했다. 숭실중을 졸업하고는 남자가 음악을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없어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다. 당시 연전에는 음대가 없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유학생인 김영환이 일본에서 귀국해 연전에 양악대와 합창단을 조직해 평양을 비롯한 전국 공연을 다님으로써 화제를 일으켰다.
김영환이 사임한 뒤 연전은 후임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미국 시카고에서 유학중이던 현제명을 불러들여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전국 최고의 음악그룹으로 향상시켰다. 인범은 현제명을 사사하며 음악부에 들어가 연희4중창단에서 활동했는데, 당시 제1 테너를 맡아 장안의 화제가 된 것을 보면 이미 전국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춘 테너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훗날 한양대 총장을 지낸 바리톤 김연준, 1950∼60년대 미국의소리(VOA) 방송에서 활동했던 전설적인 아나운서 황재경(베이스) 같은 이들이 당시 인범과 함께 활동한 학생들이다.
인범이 결정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일본고등음악원 유학 중이던 1939년 일본 마이니치 신문사가 주최한 전일본음악콩쿠르 성악부에서 수석 입상을 차지한 일이다. 인범은 1등 없는 2등상을 받았는데,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한국인이라고 1등상을 주지 않는 심사위원들에 대해 커다란 비판이 일어날 정도였다. 이 수상은 재일 한국유학생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크게 용기를 얻은 일종의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이듬해 도쿄에서 기념독창회를 가졌는데 이 독창회는 이인범이 천부의 미성과 음악적 재질을 가진 당대의 독보적인 테너라는 사실을 확인시킨 음악회였다.
어느 나라에서나 음색이 맑은 테너는 귀한 편이어서 오페라를 준비할 때 역할에 맞는 테너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테너는 가벼운 음색부터 무거운 음색까지 레지에로, 리릭, 리릭 스핀토, 스핀토, 트라마틱 그리고 헬든 테너로 구분하는데 테너의 가장 아름다운 칼라는 리릭 부근이다. 이인범은 리릭에서 스핀토까지 시원하고 맑게 트인 미성(美聲)의 음로를 올곧게 뻗쳐내는 것이 특징이다. 흔히 세계의 3대 테너로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를 꼽는데 이중에서도 파바로티의 팬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그가 높은 음역에서 멀리 뻗어나가는 맑고 깨끗한 음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있는 이인범의 오페라 몇 곡에 대해 전문가들은 결코 이인범이 파바로티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세월이 억울하다는 것이다. 지금 이런 테너가 있었더라면 당연히 세계 최고급의 가수로 각광을 받았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소리가 두개골 뒤로 새거나 옆으로 흐르지 않고 얼굴 정면에서 힘차게 솟구치는 이인범의 음색은 듣는 사람을 순간적으로 사로잡는다. 어느 날 극장의 무대 뒤에서 일하던 한 인부가 이인범에게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이마로 노래를 잘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 질문은 이인범 노래의 정곡을 찌른 질문이었다. 음이 후두부나 귓바퀴 쪽에서 나오면 드라마틱하지만 느끼한 감각을 전달한다. 그러나 이마와 미간(眉間), 그리고 콧잔등 사이로 띄워내는 정면의 레가토는 맑고 깨끗하기 이를 데 없다.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오페라의 승부가 바로 여기에 걸려 있다. 이런 점에서 이인범의 정면에서 솟구치는 서정적인 레가토는 누구도 쉽게 따라올 수 없는 천부적인 자질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인범은 서울교향악단 성악부 단원이 되어 김천애 김혜란 김형로와 함께 국민개창운동에 앞장섰고 한국 오페라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이인범이 빠진 오페라는 되지 않는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재직했고, 어떻게 생겼기에 목소리가 그리 예쁘냐고 여성들이 몰려들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일생일대의 사건이 일어난다. 1953년 10월 어느 일요일의 일이다.
그의 아내인 피아니스트 이정자가 셋집 부엌에서 석유곤로를 다루다 화재가 났다. 당시는 휘발유가 석유보다 싼 시절이어서 업자들이 석유에 몰래 휘발유를 섞어 팔던 때였다. 휘발유 때문에 삽시간에 불이 부엌에 옮겨 붙자 달려가 곤로를 밖으로 들고 나오던 이인범은 얼굴과 목, 어깨 부분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심한 사고였다.
다행이 목숨은 건졌지만 한쪽이 나무등걸처럼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비뚤어진 코·입으로는 소리를 뽑아낼 수도, 무대에 설 수도 없었다. 전국을 사로잡던 대스타에게 무대는 사라졌다. 30대 후반의 창창한 젊은 이인범은 절망 속에서 나뒹굴었다. 당시 자유당의 2인자였던 이기붕이 이인범을 일본의 유명 병원으로 보내 정형수술을 받도록 지원을 해주기도 했지만 옛날의 준수한 얼굴과 목소리를 되찾기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인범은 그냥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는 평양에서 순교한 지조 있는 목사의 아들이었다. 그 3년간의 어둠 속에서 그는 신앙의 힘으로, 피를 토하는 각고의 노력으로 다시 섰다. 1956년 5월 8일 명동 시립극장에서 열린 이인범 재기독창회. 대형 사고를 당해 사라진 이인범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 장안은 들끓었다. 매표가 시작되자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시립극장부터 명동입구까지 장사진이 펼쳐졌다. 공연 전날 표가 매진된 그의 재기독창회는 한국 공연사상 최초의 매진 이벤트를 기록한 하나의 사건이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극단 신협 단장 이해랑과 배우 최남현이 분장실로 달려왔다. 얼굴에 분을 칠하고 상처를 가리려 도와줬으나 왼쪽에만 겨우 분이 먹을 뿐이었다. 무대에 올라간 이인범은 말했다. “악단에서 나의 존재가 사라진 지 3년, 이 추한 모습을 하고 음악을 할 것인가, 아주 단념해 버리고 말 것인가. 그동안 표현할 수 없는 고난과 탄식 속에서 재기와 실망의 십자로를 방황하며 싸워왔다. 그러나 불행 중에서도 노래를 부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으며 불우한 환경을 망각할 수 있는 길이었다. 내 외양은 변하였으나 음성은 되찾았다는 데에 감사하며 노래를 부르겠다.”
그가 한쪽 얼굴을 가리려고 객석을 향해 왼쪽으로 비스듬히 서서 첫곡 스트라델라의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를 부르기 시작했다. 일순 장내는 고요해졌다. 몇 년 만인가. 어떤 고비를 지나왔던가. 이인범의 노래는 절망의 심연으로부터 솟구쳐 올라 극장을 흔들었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가 최초로 불러 한국인의 애창곡으로 만든 가곡 ‘가고파’를 비롯해 ‘발렌치아’ ‘카바티나’ ‘쿠유스 아니맘’ 같은 고난도의 오페라곡들이 메아리쳤다. 관중들은 절정의 도가니 속에서 박수를 멈추지 못했다. 대성공이었다. 피아노 반주를 맡았던 부인 이정자씨가 음악회 처음부터 끝까지 기도하며 반주를 했다는 사실도 대서특필되었다. 아내 이씨는 황해도 이름 있는 의사 가문의 딸로 최초의 피아니스트인 김영환을 사사한 숙명여대 출신의 재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사고 이후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살림과 자녀교육, 남편의 치료 뒷바라지에 헌신했던 희생적인 여인이었다.
훗날 많은 사람들이 이인범을 사랑하고 불멸의 스타로 각광을 보내는 것은 그가 역경을 딛고 일어섰다는 점에 있다. 재기독창회에 성공하면서 이인범은 61년부터 연세대 음대교수로 재직했고 66년부터 73년 타계할 때까지는 음대 학장으로 봉직했다. 타계할 당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던 그는 음대학생들이 준비하는 오페라 연습소리를 들으며 하루빨리 일어나 학생들을 도와주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채 60이 안 된 안타까운 나이였다. 그의 딸 이방숙 연세대 음대 명예교수(71)는 아버지에 이어 1992∼94년에 연세대 음대 학장을 지냄으로써 부녀(父女)가 연세대 음대 학장을 역임한 드문 기록을 세웠다. 이 명예교수는 “아버지는 녹음기가 평생의 친구였다. 그만큼 자신의 노래에 대해 철저히 연구를 하며 사셨다. 화상을 입은 이후 출타를 할 때는 모자를 쓰고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셨다. 한탄처럼 자가용이 한 대 있었으면 하시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두고두고 그 말씀이 걸린다”고 말했다. 이인범은 화상을 당한 이후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벽에 붙여놓고 살았다고 한다.
이 명예교수의 남편은 고려대 언론대학원장을 지낸 원우현 고려대 명예교수(72). 이들 부부는 정년퇴직 후 각각 고려대와 연세대에 장학금을 기탁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원-이 부부는 교회를 개척하고 봉사하는 등 근면한 신앙인으로 살고 있다. 이인범의 장남 근섭은 성악을 하고 싶어 했으나 부모들이 반대하자 미국으로 가 독학으로 MIT와 미시간대학에서 수학한 후 오하이오주립대 교수로 재직하다 퇴직 후 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차남 승섭은 서울에서 건축가로 살고 있다.
임순만 기자 s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