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 침략 현장 정원교 베이징 특파원 中 랴오닝성 르포] “역사 잊으면 안돼”

입력 2014-01-18 04:02


17일 오전 중국에 주재하는 외국 기자들과 함께 들어선 랴오닝성 푸순(撫順) 핑딩산 학살사건기념관은 10여년 전 방문했던 나치의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생각나게 했다. 이곳은 일본 관동군의 양민 대학살 현장으로 유대인 수용소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내부를 둘러보는 내내 그 참혹함에 있어서 차이가 없었다.

1932년 9월 16일 낮 푸순시내에서 남쪽으로 4㎞쯤 떨어진 핑딩산 부근 마을. 일본 관동군은 이곳 주민들이 항일유격대와 내통하고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려 3000명을 집단 학살했다. 이곳에는 기념관뿐 아니라 학살 현장에서 발굴한 유골 800여구를 그대로 보존한 유골관도 있다.

중국 외교부 주선으로 16∼17일 이틀 동안 진행된 랴오닝성 일대 일제 침략 현장 취재에는 중국에 주재하는 한국, 일본, 미국, 영국, 싱가포르, 스페인 기자 등 38명이 참가했다. 이들 중에는 한국과 일본 기자가 각각 10여명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일본 기자들은 일정이 계속되는 동안 중국 정부가 일본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여가던 시점에 이번 프로그램을 마련한 의도를 캐물으며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한 일본 기자는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기념관이나 박물관을 세우는 건 어느 나라에서나 당연한 일”이라면서도 익명을 요구하는 등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일제의 핑딩산 대학살, 대규모 살육의 서곡=랴오닝성에서는 만주사변(1931년 9월 18일) 1주년에 맞춰 선양, 푸순, 판진 등 각지에서 일본 관동군에 대한 공격이 감행됐다. 푸순에서는 항일유격대인 ‘랴오닝민중자위군’ 1200여명이 추석인 9월 15일 밤 푸순탄광, 파출소, 공장, 창고 등을 습격했다. 푸순은 탄광으로 유명해 당시 한국 사람도 많았다.

관동군은 다음날인 16일 대낮에 핑딩산 아래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무차별 보복을 가했다. 유격대원들이 핑딩산을 지나갔는데도 아무도 신고하지 않은 것은 주민들이 이들을 비호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자동소총으로 사격한 뒤 생존자를 장검으로 찔러 죽이는 식이었다. 사망자 가운데 3분의 2는 부녀자와 아이들이었다.

핑딩산학살기념관 저우쉐량(周學良) 관장은 “학살 당시 관동군에 의해 마을에서 끌려나온 사람 중에는 조선인도 있었다”고 소개하면서 “당시는 일본과 조선이 합병된 뒤라 관동군은 조선인을 자국인으로 간주해 먼저 조선인을 돌려보낸 뒤 만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랴오닝성 9·18전쟁(만주사변)연구회 왕젠쉐(王建學) 회장은 “핑딩산 학살사건은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대규모 학살사건의 첫 사례”라며 “그 후 1937년 12월에는 난징대학살로 30만명을 살육하게 된다”고 말했다.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가 수감됐던 푸순전범관리소=푸순전범관리소는 중국이 1950년 7월 당시 소련으로부터 넘겨받은 관동군 전범들을 수용해 조사와 교화를 진행한 곳이다. 원래 이곳은 1936년부터 45년까지 푸순감옥이었다.

이곳에는 그 뒤 일본 전범 982명, 만주국 전범 71명, 국민당 전범 354명이 수용됐다. 일본 전범들은 중국 내에 설치된 전범재판소에서 45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푸순전범관리소에 수감됐던 일본 전범들은 1956년부터 64년 사이에 전원 일본으로 돌려보내졌다.

특히 이곳에는 푸이가 수감되기도 했다. 관리소 측은 푸이가 생활했던 방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그의 네 번째 부인 리위친(李玉琴)이 56년 이곳으로 찾아와 이혼을 요구하자 관리소 측은 관례를 깨고 두 사람이 한 방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두 평 남짓한 콘크리트 방에는 2인용 철제 침대 위에 이불 두 채가 놓여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의 출발은 만주사변”=“중국은 일본이 1931년 9·18전쟁(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국제연맹에 제소했다. 그러나 일본은 국제연맹 조사단의 철군 결정에 따르지 않았다. 중국은 그 뒤 1945년까지 장장 14년 동안 항일전쟁을 벌여야 했다.”

선양시내에 있는 ‘9·18역사박물관’ 류창장(劉長江) 부관장은 만주사변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 나아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출발이었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만주사변은 2차 세계대전의 시작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극단적 민족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지금의 일본인”이라고 지적했다.

9·18역사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2차 세계대전 연합군 포로수용소 유적지는 지난해 5월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이곳에 수용된 포로들은 태평양전쟁 당시 필리핀에서 일본군에게 생포된 뒤 대만 가오슝과 한국 부산을 거쳐 여기까지 끌려왔다.

미국 영국 등 6개국 포로 2000여명 가운데 전쟁이 끝날 때까지 250여명이 죽어나갈 만큼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포로들은 수용소 내 허술한 2층 나무 침대에서 ‘칼잠’을 자면서 공장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군수품 생산 작업에 동원됐다. 수용소에서 500m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던 공장 부지는 지금 고층 빌딩이 들어선 상업지구로 바뀌어 있었다.

푸순·선양=글·사진 정원교 베이징 특파원 wkch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