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강광배 국제 봅슬레이스켈레톤연맹 부회장] 한국 썰매엔 희망 가득… 평창에선 메달 딴다

입력 2014-01-18 02:34


대학 1학년 때 처음 아르바이트로 스키를 접한 그는 밥먹는 시간이 아까워 리프트 위에서 김밥으로 때우며 스키를 탔다. 실력은 놀랄 정도로 쑥쑥 늘었다. 그러나 4학년때 무릎 전방 십자인대가 파열됐다. 얼마후 우연히 루지 국가대표 선발 공고를 보고 무작정 지원했다. 그후 1998년 나가노동계올림픽에 한국 썰매종목 최초로 출전했다. 저조한 성적에 오히려 열망이 더 커져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스켈레톤을 접했고, 내친김에 봅슬레이까지 배웠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루지와 스켈레톤, 봅슬레이 종목에서 모두 올림픽에 출전한 첫 선수가 됐다. 그래서 그를 ‘한국 썰매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가 씨앗을 뿌려놓은 ‘썰매 불모지’에선 새싹들이 쑥쑥 자라고 있다. 소치동계올림픽에선 그가 조련한 선수들이 첫 메달을 노리고 있다. 강광배(42) 국제봅슬레이스켈레톤연맹 부회장(ISBF)의 스토리다. 그를 17일 서울 송파구 한국체육대학 연구실에서 만났다.



-인생의 절반을 썰매에 매달려 살아왔다. 어떻게 썰매에 입문하게 됐나.

“나는 엘리트 선수 출신이 아니지만 운동을 좋아해서 대학 체육학과 갔다. 1학년 겨울방학 때 무주리조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스키를 처음 접하게 됐다.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집중해서 열심히 하니까 실력이 금방 늘어 국내 여러 대회에서 상도 받고 스키 지도자 자격증도 땄다. 그런데 대학교 4학년 때 무릎 부상으로 장애 5급 진단을 받았다. 스키는 탈 수 있지만 선수나 지도자는 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때 우연히 학교에서 나가노올림픽 루지 국가대표를 뽑는다는 공고를 받았다. 당시 1995년이었는데, 솔직히 루지가 뭔지도 몰랐다. 알아보니 누워서 타는 썰매여서 무릎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 바로 지원했다. 그리고 3명 뽑는 선발전에서 2등으로 뽑혔다. 당시 1, 3등은 소위 엘리트 과정을 거친 선수 출신이었는데, 이 종목의 미래가 암담해 보였는지 몇 달 만에 그만 두더라. 그래서 아는 후배 2명에게 국가대표가 될 수 있는 기회라고 꼬드겨서 나가노올림픽에 나갔다. 영화 ‘쿨 러닝’처럼 썰매에 바퀴를 달아 훈련을 해서 힘들게 출전권을 땄었다.”



-루지 이후 스켈레톤과 봅슬레이에서도 국가대표를 했다. 어떻게 모든 썰매 종목에서 국가대표가 될 수 있었나.



“나가노올림픽에서 출전 선수 34명 가운데 31위를 기록했지만 루지를 더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그래서 동계 스포츠 선진국인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로 유학을 떠났다. 인스부르크는 시설도 좋았고 스포츠 매니지먼트도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세대교체라는 이유로 내가 국가대표에서 제명됐다. 낙심했지만 당시 나를 지도했던 군터 렌머러 코치 등 주변에서 도와주는 분들이 있어서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마침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오스트리아 스켈레톤 국가대표로 운동하던 마리오 구텐베르크가 나에게 스켈레톤을 권했다. 루지나 스켈레톤 모두 썰매여서 적응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99년 오스트리아 대학선수권대회에서 1등을 했고, 인스부르크 클럽 소속으로 노르웨이에서 열린 월드컵에도 나갔다. 당시 한국은 국제연맹에 가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국가대표로 나설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듬해 국제연맹 가입을 이끌어냈다. 이어 2002 솔트레이크시티올림픽과 2006 토리노올림픽까지 스켈레톤 한국 대표로 나갔다. 그리고 스켈레톤을 하면서 봅슬레이도 병행했다. 2010 밴쿠버올림픽 때는 루지와 스켈레톤은 후배들에게 맡기고 봅슬레이에만 전념해 출전권을 따냈다.”



- 썰매 종목 중에서는 봅슬레이가 2008년 아메리카컵에서 4인승 동메달을 따면서 먼저 주목을 받게 된 것 같다.



“우리나라 썰매 종목의 발전은 평창올림픽 유치 과정과 궤를 같이 한다. 강원도가 2007년 개최지 투표에서 떨어졌지만 재도전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인 2008년 1월 아메리카컵 2차 대회 4인승 경기에서 운 좋게도 3위를 기록했다. 당시 선수도 없고 봅슬레이조차 500달러에 빌려서 탔는데 국제 대회 첫 수상이라 한국에서 난리가 났다. 봅슬레이 대표팀의 열악한 연습 환경이 주목을 받게 되면서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는 나라가 너무 열악하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덕분에 당시 강원도에서 썰매를 사주고 정부에서 전지훈련 비용을 댔다. 이후 평창올림픽 유치하면서 썰매 종목 스타트 연습장도 생겼다.”



-평창올림픽 유치위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는데 유치와 관련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유치위에 몸담은 것은 2002년 당시 대한체육회 백성일 본부장이 나를 추천했기 때문이다. 당시 평창과 무주의 경합 끝에 평창이 이미 한국 유치지로 결정된 뒤였는데, 전북 출신인 내가 평창을 위해 일한다고 고향에서 미움을 받았다. 일부에선 나를 매국노에 빚대 ‘매향노(賣鄕奴)’라고 불렀을 정도다. 사실 나는 국제규격 면에서 평창이 낫고 엄청난 세금이 투입되기 때문에 지역 감정이나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있었다. 솔직히 평창올림픽이 3수 끝에 된 게 준비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어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한다.”



-지금 국가대표팀 선수들 대부분을 발굴했는데, 어떻게 유망주를 알아보고 선발하나.



“주변의 체육계 선생님들이나 선배에게 ‘부상을 당해 운동을 그만둔 선수가 없느냐’고 늘 물어본다. 사실 운동 선수들은 누구나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따는 꿈을 갖고 있다. 부상 때문에 그 꿈을 접기도 하는데, 썰매 종목은 초반 30m만 달리고 나머지는 장비를 조종하는 것이어서 상관없다. 이런 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엘리트 코스를 거쳐와서 운동신경이 좋기 때문에 금방 숙련된다. 특히 한국체대 교수로 임용돼서 와보니 학생 정원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종목 교수님들이 나중에 학생 정원을 썰매에 일부 양보도 해주셨고, 고등학교를 돌면서 지금의 대표팀 선수들을 만났다. 한마디로 외인구단인 셈이다. 그리고 외국인 코치들 덕분에 우리 선수들이 많이 업그레이드됐다.”



-썰매 대표팀이 소치나 평창올림픽에서 어떤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나.



“솔직히 소치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현재 우리 대표팀이 대륙간컵과 아메리카컵에서는 메달을 땄지만 상위권 선수들이 나오는 월드컵에서 10위권 밖이다. 소치에서 10위권 안에만 든다면 성공이다. 평창에선 꼭 메달을 딸 것으로 기대한다. 2016년 썰매 경기장도 완공되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다.”



-썰매종목은 비인기종목으로 간주되는데 좀더 대중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나는 썰매 종목이 비인기 종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들 누구나 어렸을 때 비료포대나 나무 썰매를 타 본 적 있기 때문에 봅슬레이, 루지, 스켈레톤 등 썰매 종목에 대해 친숙함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이들 종목이 우리나라에 가장 늦게 들어왔기 때문에 잘 모를 뿐이지만 요즘 관심 갖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게다가 평창에 경기장이 생기면 교육이나 관광으로 다양한 썰매 체험을 할 수 있고 대회도 유치할 수 있기 때문에 비전이 아주 밝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