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김혜림] 남성들이여, 앞치마를!

입력 2014-01-18 01:32 수정 2014-01-18 14:40


1월 달력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새해 마음먹은 바를 실천하지 못해서? 아니다. 이쯤에서 ‘나도 그런데’ 하는 이들은 ‘며느리’들이다. 빨갛게 표시돼 있는 30, 31일과 2월 1, 2일. 설 연휴는 며느리들에게는 ‘노동’절이다.

결혼하고 한 10년은 시어머님이 장보기와 명절음식 준비를 주관하셨다. 퇴근한 뒤 시댁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죄인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로 시작된 명절 연휴는 ‘남편은 방에서 뒹굴뒹굴하는데 나는 주방에서 종종거려야 하나’ ‘친정에는 언제 가나’ 등의 생각으로 속이 편치 못했다. 요즘 20, 30대인 사촌·육촌 동서들을 보면 ‘응사(응답하라 1994)’ 시절의 명절 풍경이 되풀이되고 있다. 설날 큰집에 오는 그녀들의 자리는 여전히 주방이다. 그녀들의 남편은 거실과 건넌방에서 또래들과 노닥거리고 있고.

동서들 중에는 이른바 ‘경단녀(경력단절여성)’도 있다. 아이 낳고 산전·후 휴가와 육아휴직으로 9개월이나 쉬고 복직하더니 두어 달 다니다 그만두었다. 지난해 추석 때 “회사가 불이익을 주더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이유는 ‘아이 기르고 살림하면서 직장 다니기가 힘들어서’였다. 동서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저 사람은 퇴근한 뒤 힘들다고 꼼짝도 안 해요. 저는 안 힘드나요?”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을 비롯해 미국 CNN, 블룸버그 통신, 인도 TV 방송 등 외신과 인터뷰할 때마다 “여성들이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을 겪지 않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밝히고 있다. 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여성 인력 활용은 경제 발전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기획재정부 등이 남성 육아휴직 활성화, 여성의 재취업을 활발하게 수행하는 기업에 대한 인센티브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경단녀 지원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는 이유다.

정부는 국가 지원과 기업주의 인식변화를 경단녀 대책의 양 기둥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는 주춧돌에 지나지 않는다. 그 위에 기둥을 세우는 것은 남성들의 몫이다. 남성 육아휴직 제도가 아무리 잘 돼 있어도 활용하지 않는다면 그림의 떡이다. 또 기업이 출산과 육아에 불이익을 주지 않고, 경단녀들을 환영한다고 해도 가사노동을 전담해야 한다면 ‘알파 걸(모든 면에서 남녀가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뛰어난 여성들)’들은 경제활동을 사양할 것이다. 실제로 고용정보원이 최근 전국 대졸 이상 기혼 경력단절 여성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4.3%가 “재취업 의사가 없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 41%가 ‘직장생활을 하는 데 따른 일·가정 양립의 어려움’을 꼽았다. 알파 걸들은 일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슈퍼 우먼’과는 다른 세대다.

여성부(지금의 여성가족부) 출범 이듬해인 2002년 출입기자단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가족친화 정책을 취재했다. 당시 이탈리아 남녀평등 및 기회균등국가위원회 위원장은 그 나라가 1977년 남성 육아휴직제를 도입했으며, 이는 유럽연합(EU) 국가 중 처음이라고 자랑했다. 사용률을 묻자 표정은 굳어졌다. “남성 육아휴직자는 10% 미만으로, 남성의 가사 분담률을 높여야 여성들이 일터로 나설 것이며, 여성의 사회참여율이 높아지면 출산율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도 남성은 바깥일, 여성은 집안일 등 성 역할 분담 전통이 강하다.

달력의 명절 연휴를 알려주는 빨간 숫자들을 여성들이 남성과 똑같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경단녀는 줄어들 것이며, 재취업 역시 활발해질 것이다. 남성들이여, 앞치마를 두르라. 그것이 애국하는 길이다.

김혜림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