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中 바둑 자존심 격돌] 이세돌 9단 vs 구리 9단 ‘끝장대결’
입력 2014-01-18 01:32
한·중 바둑계의 두 간판스타가 오는 26일부터 누가 더 강한지를 가리는 운명의 10번기를 시작한다. 열 번의 대국에서 먼저 6승을 거두는 쪽이 사상 최고액의 상금을 독식하는 파격적인 방식의 대결이다. 바둑 인기가 예전만 못한 한국에서도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 만한 흥미로운 이벤트다.
맞대결의 주인공은 이세돌 9단과 구리(古力) 9단이다. 이 9단은 조훈현과 이창호의 뒤를 잇는 한국 바둑의 최강자이며, 구 9단도 그에 못지않은 중국 최고수로 평가받는다. 두 기사(棋士)는 나이와 기풍(棋風), 상대 전적 면에서 더할 나위 없는 호적수다. 1983년생으로 31세 동갑내기이며 둘 다 공격적인 스타일의 바둑을 둔다. 공식 기전 상대 전적은 이 9단이 16승1무17패로 뒤지지만 두 차례의 비공식전 결과를 포함하면 18승1무17패로 앞선다.
10번기는 26일 베이징에서 시작해 6월을 제외한 매월 마지막 일요일에 한 판씩 치러진다. 중국 기업이 후원하는 대회여서 제4국만 한국에서 실시되고 나머지 대국은 중국 각지를 순회하며 열린다. 어느 한쪽이 6승을 하면 10번기는 종료된다.
승자에게 주어지는 상금은 500만 위안(8억7900만원)으로 역대 모든 기전을 통틀어 가장 많은 액수다. 패자에게는 여비조로 20만 위안(3500만원)만 지급된다. 단 5대 5 무승부로 끝나면 두 기사가 상금을 절반씩 나눠 갖는다.
10번기는 타이틀전이 보편화된 요즘에는 거의 사라진 방식이다. 한두 번의 승패로는 진정한 실력 차를 판단하기 어려우니 열 번의 승부로 확실하게 상수와 하수를 가리자는 취지다. 지는 쪽은 하수로 낙인찍히는 잔인한 게임이어서 그동안 쌓아온 명성과 경력에 치명적인 흠집이 생길 수 있는데도 두 기사는 모험과 난전(亂戰)을 즐기는 전투형 기사답게 흔쾌히 승부에 나선다. 10번기 실시 계획을 밝힌 지난해 11월 기자회견에서 이 9단은 “설령 패해 정상에서 추락한다 해도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며 “두려움을 즐기면서 임하겠다”고 말했다. 구 9단도 “이 9단은 내가 바둑에서 끊임없이 추구해온 목표로, 그와는 60세가 될 때까지 반상(盤上)에서 겨루고 싶다”고 했다.
이번 10번기를 일회적이고 개인적인 이벤트로 여길 수도 있지만, 양국의 대표 기사가 맞붙는 시합이다 보니 양국 바둑의 자존심을 건 승부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일본의 오랜 부진으로 사실상 한·중 2파전인 세계 바둑계는 최근 들어 무게중심이 급격히 중국으로 쏠리고 있다. 국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우수한 기사들을 대거 양성해 한국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한국 바둑은 총 일곱 차례의 세계대회 개인전에서 무관(無冠)에 그치는 수모를 당했다. 6개의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중국이 휩쓸었고 마이너 대회 타이틀 1개는 일본이 가져갔다. 세계대회 단체전은 한국이 싹쓸이했지만 1996년부터 17년간 이어져온 개인전 우승 전통은 끊겨버렸다.
위기에 처한 한국 바둑계는 이 9단이 보란 듯 구 9단을 꺾어 분위기를 반전시켜주기를 고대하고 있다. 물론 이 9단이 질 경우엔 중국으로의 쏠림 현상이 가속화될 전망이다. 중국 매체들은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로 이어져온 한국 바둑의 찬란한 역사가 종언을 고했다”고 떠들어댈 것이 뻔하다. 그야말로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다.
천지우 기자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