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中 바둑 자존심 격돌 : 한국 바둑사 명대국 명장면] ‘휠체어 대국’ 조치훈 불굴의 승부사 명성

입력 2014-01-18 01:33


바둑은 요순(堯舜)시대 중국에서 시작됐지만 에도시대 이후 일본에서 꽃을 피워 20세기 후반까지는 일본이 바둑 종주국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의 주도권은 강고했지만 일본 기사들로부터 배운 한국의 천재들이 결국 일본을 무너뜨렸다.

조치훈(58) 9단은 일본의 주도권을 빼앗았다기보다는 일본 내에서 최고가 된 사례다. 1962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68년 만 11세 9개월의 나이로 일본기원 최연소 입단기록을 세웠다. 이후 일본 3대 타이틀(기성·명인·본인방)을 동시에 석권하는 대삼관(大三冠)에 3차례나 올랐고 일본 최다 타이틀 획득(72회), 통산 최다승 등 깨지기 힘든 기록들을 작성하고 있다.

조치훈의 수많은 승부 중에서도 바둑 팬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전대미문의 ‘휠체어 대국’이다. 86년 1월 조치훈은 기성 방어전을 열흘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했다. 의사는 목숨을 건진 게 용하다며 대국을 포기하라고 했지만, 조치훈은 두 다리와 왼쪽 손목에 깁스를 하고 휠체어를 탄 채로 대국실에 들어섰다. 당시 비록 도전자인 고바야시 고이치에게 기성 타이틀을 내주긴 했으나 그때 이후 ‘목숨 걸고 바둑 두는’ 불굴의 승부사로 각인됐다.

한국 바둑사에서 가장 감격스러웠던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제1회 잉창치(應昌期)배 결승전일 것이다. 혈혈단신으로 잉씨배에 참가한 조훈현(61) 9단은 당시 일본의 고수들을 연거푸 꺾었던 녜웨이핑 9단과 결승에서 만나 3대 2 대역전승을 거뒀다. 일본과 중국에 밀려 들러리였던 한국 바둑은 이 사건 하나로 변방에서 중심부로 진입했다. 고(故) 세고에 겐사쿠 9단 문하생 출신인 조훈현은 이후 각종 대회에서 발군의 활약을 펼쳐 ‘최강 한국 바둑’의 시대를 열었다.

조훈현이 녜웨이핑에게 불계승을 거둔 잉씨배 결승 5국(최종국)은 지난해 최고 인기 웹툰인 윤태호 작가의 ‘미생’에 기보가 실려 다시금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 바둑의 절대자 조훈현은 84년 9살의 이창호를 내제자로 들였다. 내제자란 스승의 집으로 들어가 숙식을 함께 하며 배우는 제자로, 그때까지 한국에 없던 제도다. 국내 1호 내제자인 이창호는 이후 청출어람(靑出於藍·제자가 스승보다 낫다)이란 말뜻을 몸소 실천했다. 17세 때인 92년 세계 정상(제3회 동양증권배 우승)에 오른 뒤 20년 가까이 절대 넘볼 수 없는 지배자로 군림했다. 자존심이 강한 중국인들조차도 그에게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란 수식어를 아끼지 않았다.

이창호는 수많은 세계대회 개인전 우승 대신 국가대항 단체전에서 우승했던 때를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꼽았다.

2005년 농심신라면배가 그것이다. 농심신라면배는 한·중·일 3국의 연승전 방식으로, 이긴 사람이 계속해서 나머지 두 국가의 다음 선수들과 대결을 펼친다. 한번 패한 선수는 바로 탈락이다. 9국이 끝났을 때 일본은 2명, 중국은 3명이 남았지만 한국은 주장 이창호 혼자 남았다. 당시 이창호는 극심한 슬럼프에 빠져 있어서 한국으로선 패색이 짙었다. 하지만 이창호는 엄청난 투혼을 발휘해 두 나라의 기사 5명을 모조리 꺾고 우승컵을 안았다. 중국 언론은 이창호의 5연승을 삼국지에서 관우가 조조의 다섯 관문을 단기필마로 돌파하며 유비에게 돌아간 ‘오관참장(五關斬將)’에 비유했다.

천지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