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혜진] 스펙과 스토리

입력 2014-01-17 01:34


얼마 전 모교에서 취업특강 요청이 왔다. 드디어 내게도 이런 날이 하며 잠시 들뜨려던 마음을 냉큼 불안이 잡아 앉혔다. 이런 특강이란 성공한 선배들이 당당히 입장해 냉철하게 확신과 희망을 뿜어내는 곳이 아닌가. 지금까지 ‘방황의 아이콘’으로 살아가며 좌충우돌하고 있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지 심히 불안했다. 다행히 내가 하는 일을 얘기해 주라기에 조심스럽게 도전해 보기로 했다.

호기심에 찬 수십 개의 눈망울이 빛나는 교실, 덜덜 떨며 강의를 하고 학생들의 질문에 답을 하며 간신히 특강을 마무리했다. 송곳 같은 질문엔 미래에 대한 크나큰 불안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학교를 나서는데 후련한 마음 한쪽에 취업의 무게에 짓눌린 학생들의 부담감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물론 사회 진출이란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청춘을 시험하는 힘든 도전이다. 청년의 낭만이나 패기와는 결이 다른 자격과 실력을 갖추고 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요즘의 스무 살들은 나의 스무 살 때와는 다른 듯하다. 훨씬 더 많은 스펙을 요구받고 훨씬 적은 실패의 가능성만이 허용된다. 세상과의 퇴로 없는 싸움에 대한 부담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이제는 그들에게 스펙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으니 스토리를 요구한다. 남다른 모험과 도전의 기록으로 기성세대를 감동시켜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특히 누군가의 가슴을 움직일 만한 스토리란 어떤 것인가. 인풋 대비 아웃풋을 얄팍히 계산하지 않은, 진한 경험이 그만의 생각과 고군분투를 만났을 때 비로소 빚어지는 것 아닌가. 그만큼 획일화되지 않은 시간을 요하는 과정이다. 나는 이것을 책을 만들며 만난 당대의 지성과 리더들을 통해 배웠다. 누군가에게 선택되기 위한 시간이 아닌 자기만의 시간…. 거기엔 무수한 실패가 있었고 고민의 흔적이 녹아 있었다.

그렇기에 10년이 넘게 레고블록처럼 빈틈없는 스펙 쌓기를 요구받는 학생들이 어느 순간 스토리가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부 기업들의 인재 발탁 기준을 스펙에 두지 않겠다는 ‘과감한’ 선언이 그래서 와 닿지 않는다. 그러니 ‘요즘 애들은 도대체’로 시작되는 걱정과 우리세대의 무용담일랑 집어치우고 냉정히 돌아보자. 기성세대의 이중 잣대로 그들에게 인생 스토리 창작마저 하나의 스펙처럼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혜진(해냄출판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