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도 외면한 돈, 상가 권리금 해부 ④] 창업하신다고요? ‘3개 용어’ 공부 먼저…

입력 2014-01-16 02:33


④ 상가임대차보호법의 허실

한재오(40)씨는 2012년 4월 충북 청주에 52.8㎡(16평) 작은 미용실을 냈다. 권리금 1700만원에 보증금 500만원, 월세 35만원. 처음 마련한 ‘내 가게’다. 지난해 11월 건물주에게서 내용증명이 날아왔다. 계약 때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 재건축을 하니 나가라는 거였다.

상가임대차보호법은 이런 소규모 점포에 5년간 계약갱신요구권을 줬다. 그런데 한씨가 찾아간 변호사는 “그냥 버티라”고 했다. “버티면 건물주가 합의하자고 할 수도 있다.” 건물주가 재건축 카드를 꺼내면 법으론 어쩔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사정을 정부도 안다. 그래서 지난해 8월 상가임대차보호법을 개정하며 ‘계약 당시 재건축 계획을 미리 고지한 경우’에만 임차인을 내보낼 수 있게 제한했다(10조1항). 하지만 개정법은 시행일(2014년 1월 1일) 이후 체결·갱신된 계약에만 적용된다. 한씨처럼 이미 계약을 맺어 장사하고 있는 수많은 임차상인은 버티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올해 새로 점포를 얻어 창업에 뛰어드는 이들의 권리금은 얼마나 ‘안전’할까? 만약 당신이 창업을 생각 중이라면 반드시 공부해야 할 용어가 3개 있다. 계약갱신요구권, 환산보증금, 그리고 화해조서.

올해부터 개정법 적용… ‘임대료 폭탄’ 허용

◇계약갱신요구권의 함정=건물주와 임차상인은 통상 2년마다 재계약을 한다. 1년마다 하자는 건물주도 많다. 고작 1∼2년 장사하고 쫓겨나면 손해가 너무 크니까 상가임대차보호법은 환산보증금 기준 이하, 즉 소규모 점포에 한해 5년간 계약갱신요구권을 보장했던 것이다.

개정법은 이를 큰 점포로 확대했다. 올해 당신이 점포를 얻는다면 환산보증금과 상관없이 5년간은 재계약을 거절당하지 않고 장사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그런데 법을 개정한 이들이 하나를 빠뜨렸다. ‘월세 인상률 상한선(9%)’은 종전처럼 작은 점포에만 적용되도록 놔뒀다.

이성영 토지정의시민연대 정책팀장은 “건물주가 월세를 두 배, 세 배 올리면 나가지 않고 배길 임차인이 별로 없다”며 “계약갱신요구권만 줘선 실효성이 없다”고 말했다.

개정법은 임차인에게 계약갱신요구권을 주면서 건물주에게 그걸 무력화할 ‘임대료 폭탄’을 허용한 셈이다. 서울 가로수길 같은 상권은 이미 재계약 때 월세를 두 배로 올리는 게 공식처럼 돼 있다.

어쨌든 당신이 5년을 버텼다면 점포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그럼 그 다음엔? 건물주는 언제든 재계약을 거부할 수 있다. “내 건물 내가 쓰겠다”거나 설계도를 한 장 만들어 와서 “리모델링하겠다” 하면 당신은 다른 상인에게 양도할 기회를 잃는다. 권리금을 날리게 된다는 뜻이다.

5년 장사하면 권리금과 시설투자비를 만회할 만큼 벌었을까? 법은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상인들은 “턱도 없다”고 한다. 소상공인진흥원은 지난해 자영업자 1만490명을 상대로 실태조사를 했다. 월 순이익을 물었더니 100만원 미만 27%, 100만∼200만원 29.7%, 200만∼300만원 23.9%였다.

맘상모(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는 지난해 법 개정을 청원하며 임대차 보호기간 5년을 10년으로 늘려 달라고 했다. 창업 후 소요되는 정착 기간을 감안하면 5년은 너무 짧다는 것인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택과 달리 상가 환산보증금 차등 보호

◇환산보증금의 역설=상가임대차보호법은 ‘보증금+(월세×100)’이란 공식의 환산보증금을 기준으로 임차상인 보호에 차등을 둔다. 지난해까지 서울 3억원, 수도권과밀억제권역 2억5000만원, 광역시 1억8000만원이던 걸 올해부터 각각 4억원, 3억원, 2억4000만원으로 상향조정했다.

정부는 “이로써 서울의 상인 90%가 임대차보호법 적용을 받게 됐다”고 말했는데, 현장에서 점포 거래를 중개하는 한국창업부동산정보원 권강수 이사는 “적용 대상이 35%도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이 간극을 권정순 서울시 민생경제자문관은 “평균의 함정”이라고 설명했다.

“90%라는 정부 통계는 저 변두리 골목의 구멍가게까지 다 포함한 수치입니다. 상권이 형성되지 않아서 권리금도 없고 오히려 임차인이 나갈까봐 건물주가 전전긍긍하는 점포들까지 계산에 넣은 거예요. 그렇게 기준을 정하니 정작 분쟁이 많은 지역의 상인들은 대부분 배제되는 거죠.”

올해 당신이 서울에서 보증금 1억원, 월세 260만원에 점포를 얻는다고 가정하자. 환산보증금은 1억원+(260만원×100)=3억6000만원이다. 환산보증금 기준(4억원) 이하의 점포를 구했으니 운이 좋은 것이다. 당신에겐 월세 인상률 상한선 9%가 적용된다.

그런데 건물주가 계약 기간을 1년으로 했다. 매년 재계약 때마다 9%씩 월세를 올릴 경우 2년만 지나면 당신의 월세는 308만9000원, 환산보증금은 4억890만원이 된다. 3년째 재계약부터는 보호막이 사라져 ‘임대료 폭탄’을 맞을 수 있다.

권 자문관은 “주택임대차보호법에는 환산보증금 같은 구분선이 없다. 전세보증금 5000만원 다세대주택이나, 10억원이 넘는 강남 아파트나 세입자라면 다 같은 보호를 받는다. 상가임대차보호법이 보호 범위를 제한하는 건 상인의 영업권을 주거권만큼 중요하게 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턱대고 화해조서 서명했다간 ‘낭패’

◇화해조서의 공포=‘제소(提訴) 전 화해조서’는 민사 분쟁이 생겼을 때 당사자들이 “소송까지 가지 말고 이렇게 정리하자”고 합의하는 문서다. 소송을 안 하기로 약속하는 거라 대법원 판결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익명을 요구한 임차상인 A씨(55)는 서울 강남역 부근에서 커피숍을 하고 있다. 3년 전 입점 때 건물주는 그에게 계약서와 함께 화해조서를 내밀었다. ‘월세를 석 달 이상 밀리면 퇴거한다’ ‘건물주에게 권리금을 요구하지 않는다’ ‘유입비(세입자가 건물 시설을 보수하며 들인 돈)는 반환하지 않는다’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A씨는 “다른 상인들도 다 화해조서를 쓰고 입점해 있었다. 화해조서를 써야 계약한다고 해서 서명했다”고 말했다. 분쟁이 생기지도 않았는데 미리 “법원엔 안 가겠다”고 약속해준 것이다. 이렇게 화해조서를 작성하면 건물주는 임차인을 내보내기가 한결 편해진다. 명도소송 하느라 시간·비용 들일 필요 없이 바로 강제집행을 할 수 있다.

법무법인 도담의 김영주 변호사는 “큰 상권은 많은 건물주들이 아예 계약 때부터 화해조서를 작성해 여차하면 내보낼 준비를 미리 해둔다”며 “임차인들은 대부분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서명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건물주 어떤 사람인지 주변에 물어보세요

◇이 세 가지보다 더 중요한 건?=계약갱신요구권, 환산보증금, 화해조서를 다 공부한 당신, 아직 창업 준비를 끝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남아 있다.

점포중개업체 김동명 팀장은 “한국에서 임차상인으로 창업에 성공하려면 점포를 내려는 곳의 건물주가 어떤 사람인지 공부해야 한다. 이건 업종이나 자본금, 노하우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아무리 장사 잘하면 뭐하나. 속수무책 권리금 털리고 나오는데”라고 했다.

건물주가 명도소송을 낸 적이 있는지, 재건축이나 매각 얘기를 꺼낸 적은 없는지, 재산은 얼마나 되고 빚은 없는지 등을 그 동네 주민이나 임차인들을 통해 최대한 파악하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좋은 건물주가 어떤 사람인지 아세요?” 김 팀장은 이렇게 슬쩍 묻더니 “해외 체류 중인 자산가”라고 했다. 물리적으로 멀고 돈도 많아 임차인에게 별로 신경을 안 쓴다는 것이다.

특별취재팀=태원준 차장 이도경 박세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