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명희] 짝사랑
입력 2014-01-16 01:33
1882년 니체는 폐병 치료차 로마에 휴양 온 스물한 살의 루 살로메를 만난다. 첫 만남에서 “우리가 어느 별에서 내려와 여기서 만나게 되었지요”라며 빠져들었던 니체는 청혼했다가 거절당한다. 절망적인 사랑 후 그는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썼다. 니체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1887년 예이츠는 스물두 살에 미모의 배우이자 민족운동을 하는 모드 곤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쉰 살이 넘을 때까지 30년 동안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청혼했지만 거절당했다. 예이츠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내는 예이츠가 모드 곤에게 썼던 연애편지들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보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산 베토벤은 1801년 짝사랑하던 이탈리아 귀족 줄리에타 귀차르디에게 바치는 소타나 ‘월광’을 작곡했다. 1810년 마흔 살에는 열일곱 살 테레제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연애편지를 보내고 청혼했다. 이때 작곡한 ‘엘리제를 위하여’가 테레제를 위한 곡이다. 브람스도 슈만에게 음악을 배우면서 슈만의 아내이자 열네 살 연상인 클라라를 짝사랑했다. 클라라는 슈만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재혼하지 않았고, 그녀를 잊지 못한 브람스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셸 프로스트는 “유일하게 지속되는 사랑은 짝사랑”이라고 했다. 황동규 시인은 고교 3학년 때 연상의 여인을 향한 짝사랑을 담아 교지에 쓴 ‘즐거운 편지’를 통해 기다림의 미학을 노래했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짝사랑은 왠지 외롭고 처연하다. 약혼자가 있는 로테를 사랑하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며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베르테르처럼. 달콤함 대신 고뇌와 절망으로 가득 찬 짝사랑은 천재 예술가들에게서 위대한 작품을 뽑아내는 동력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고교 때부터 짝사랑했던 여자 선생님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살해한 20대가 구속 기소됐다고 한다. 좋아하면서도 고백 한 번 하지 못하고 속앓이만 했던 지금 중년들의 20대를 생각하면 세상 참 많이 달라졌다. 협박 전화와 이메일을 보내고 만나주지 않는다고 칼부림까지 서슴지 않는 빗나간 사랑을 보면 숭고해야 할 사랑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