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손수호] 젊은이들은 왜 이리 왜소할까

입력 2014-01-15 01:31


지금 고등학교에서는 특정 성향의 역사 교과서 채택을 놓고 난리지만 전교조-반전교조라는 구도, 혹은 양 진영을 대표하는 시민단체의 다툼일 뿐이다. “교학사 발행 교과서를 사용하는 것은 망신”이라며 플래카드를 든 사람들 속에 대학생 또래는 찾기 어려웠다. 서울대 가지 않을 바엔 역사 과목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이들에게 박종철 이한열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흉이 아니다.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대자보도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진보 성향의 미디어들이 봉기의 불을 지피려 애쓴 보람도 없이 스르르 사그라졌다. 내부의 동력을 얻지 못한 탓이다. 이런저런 대자보랍시고 읽어보니 글에 기개가 없고 문장마저 조잡했다. 영화 ‘변호인’의 1000만 관객이 변화의 신호라는 시각도 있지만 ‘응사’ 이상의 메아리가 들리지 않는다.

비단 교과서나 대자보뿐 아니라 나라 안팎의 일에 대해 젊은이들의 생각이 희미한 것은 불행이다. 시대의 담론을 주도하는 지성의 목소리가 없다.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역시 기존 정당의 프레임을 추종할 뿐이다. 이런 청년들의 무기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일단 “대기업 취직이 최고!”라고 외는 어른들의 영향이 크다. “남자친구 직장이 G마켓”이라는 딸의 말에 엄마가 실망했다는 우스개도 있다. 온라인 강자 G마켓을 동네 슈퍼로 오인한 탓이다.

취업으로 인생 성패 갈려서야

정부도 젊은이들을 소시민으로 만드는 데 한몫했다. 신자유주의가 국정에 도입된 이후 대학은 거대한 직업양성소로 변했다. 경쟁력을 높인다는 이름 아래 평가에 취업률을 중시하자 대학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등록금 동결 이후 기댈 곳은 정부 지원금밖에 없기에 더욱 그렇다. 학생들도 이런 분위기에 젖다 보니 변변한 직장을 잡지 못하면 모교에 누를 끼치는 것으로 걱정한다.

하지만 취업이란 게 뭔가. 회사에 들어가 고용관계를 형성한다는 말이다. 고용관계란 것은 사업체에서 노동을 제공하고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 삶이다. 기존 질서에 편입돼 머슴살이를 하면서 새경 받는 삶이 최고라고 가르치다니. 엘리트 청년들이 아무 생각 없이 탐욕적인 기업 총수의 사익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딱하다.

이처럼 젊은이들이 왜소해서야 미래를 견인할 수 없다. 해법은 혁신의 기상을 갖도록 북돋우는 일이다. 취업에 목숨을 걸기보다 창업을 도모할 수도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들만의 창의적 아이디어, 강인한 의지, 두려움 없는 모험심이 자산 아닌가. 빌 게이츠나 저커버그, 안철수 모두 안전하게 취업했다면 그런 성과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꿈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자

문제는 물에 빠지지 않고는 윈드서핑을 배울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물이 위험하다며 뭍에 묶어두려 한다. 오히려 실패했을 때 용기를 주고 격려하는 곳이 학교이고 정부여야 한다. 예술가들 또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창발(創發)의 사고를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는 데도 그저 불안한 비정규직쯤으로 여긴다. 제2의 백남준이 자라고 있어도 취업하지 못한 루저로 내버려둘 것이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인촌상의 용기 있는 선택이다. 인촌상 운영위원회는 지난해 교육부문 수상자로 서울예대를 선정했다. 예술 인재를 양성해 한류문화의 세계화에 기여했다는 이유다. 이 학교는 영광스러운 상을 받으면서 합격자 최초 등록률, 재학생 정원 충원율 등을 자랑했지만 취업률은 끝내 공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상이 더욱 빛난다.

곧 설날이다. 어른들이여, 명절에 모인 젊은이들에게 “대기업 취직이 최고!”라고 속삭이거나 닦달하지 말자. 취업은 목적이 아니라 꿈을 펴는 수단에 불과하니까. 그들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 스스로 꿈을 펼칠 수 있는 일을 찾을 때까지 좀 느긋하게 기다려주자.

손수호(객원논설위원·인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