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강은교] 執者失之(집자실지)
입력 2014-01-15 01:31
오늘도 행복의 의미에 고민하면서 집 뒤 범어사에 올라간다. 그 바위와 또 만난다. 이름이 커다랗게 새겨진 바위이다. 곳곳의 잘생긴 바위에는 어김없이 어떤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대웅전 옆 청룡암에는 문장가로 유명했다는 동래부사의 시구도 새겨져 있다. 그 시구가 비바람에 씻겨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된 것을 눈을 비벼 들여다보면서 시라는 것을 생각하다가, ‘돌에 새긴다고 남으랴’ 하면서 길을 내려온다. 윤동주의 시를 새긴 시비(詩碑)가 매연에 시커멓게 되어 나동그라져 있던 어떤 길거리를 잠시 떠올리기도 한다.
대웅전 뜰에서 내려오다가 대나무 숲을 만났다. 잠시 바람을 맞으며 거기 난간에 기대서서 대나무들을 바라본다. 참 곧게도 섰구나, 하면서 대나무의 몸매에 감탄하는데 자세히 보려니 거기 대나무에도 가득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저 높은 데 어떻게 글자를 새겼을까 싶을 정도의 키 큰 대나무 꼭대기에도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개중에는 하트를 그려 놓고 그 양쪽에 두 사람의 이름을 새긴 경우도 있다. 아마 연인들인 모양이다. 아니면 짝사랑하는 연인의 간절한 마음이든지…. 그러나 그렇게 움켜쥐어 보려 한다고 사랑이 쥐어지는 것인가. 시간이라는 것, 생명이라는 것, 예술이라는 것, 인연이라는 것도 그렇게 움켜쥔다고 이루어지는 것인가, 또 건방지게 중얼거린다.
언젠가 톨스토이의 묘에 갔었다. 톨스토이의 묘, 그 거대한 이름에 비하면 놀랄 정도로 너무 작은 묘, 풀만이 가득하다. 비석도 없다.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명당자리도 아니다. 계곡 옆에 위태하게 앉아 있으니까. 톨스토이의 풀무덤을 생각하면서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올린다. 모스크바의 아름다운 궁전의 황금의 돔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그 컬러풀한 별장과 궁전들, 생각해보면 다 ‘움켜쥔’ 본보기들일 뿐이다. 그것들의 ‘움켜쥠’은 이름 석 자 새기는 정도가 아니라 피를 새긴 것들이었다. 수은 중독으로 무수한 농노들이 죽었다니까. 그 황금 돔 아래서 혹은 루비의 기둥 앞에서 행복한 춤을 추었을 사람들, 결국 많이 ‘움켜쥐었던’ 사람들….
하긴 이렇게 이야기를 끌고 가다 보니까 어쭙잖지만 일생을 걸어오며 쓴 내 시도 ‘우스운 움켜쥠’ 또는 집착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긴 현대의 어떤 철학자는 ‘욕망이야말로 생산하는 힘’이라고 했으니(들뢰즈), 그 논리로 말하자면 집착이야말로 삶이 되는 것인가?
강은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