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설 목사의 시편] 시작과 마침은 근본이 같다

입력 2014-01-15 01:34


필자는 부목사를 거쳐 담임목회의 기회를 얻었다. 담임목사가 되기 전까지 내 본분은 웃어른을 잘 섬기는 것이었다. 부목사로서 권한도 없었고 영화를 누려본 적도 없었다. 5년의 기간을 그런 마음으로 생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법 규모가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 부임하게 되었다. 40대 초반 때의 일이었다.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권력과 권한이 주어지면서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나에게 주어진 권력과 영화를 아무 생각 없이 누리기만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나도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기에 ‘상실의 과정(Loss process)’을 인정하지 못하고 당연히 내려놓고 떠나야 할 것에 집착할 것 같았다. 상실이라는 은퇴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래서 그때 “지금이 은퇴를 준비할 시점이다, 지금부터 은퇴를 위한 결심을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지금 그 결심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생각날 때마다 미래의 은퇴 방법을 다짐하곤 한다.

고대사회부터 권력과 영화는 한 개인과 집단의 전유물이었다. 봉건 영주들의 삶이 그랬고,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봐도 그렇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감히 권력과 영화를 넘볼 수 없었고, 이를 인륜에 어긋나는 일로 여겼다. 지금도 권력을 빼앗기 위해 도전했다가 실패하면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범죄자가 되지 않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과 영화를 나누고 공유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더 오랫동안 더 많은 권력과 영화를 누리려고 온갖 방법을 쓴다.

이러한 모습은 합법적이지 않은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던 독재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 중에도 역할을 내려놓지 못하고 집착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대부분 내려놓아야 한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불안과 초조함에 빠진다. 이런 집착은 유무형의 것들이 자신 곁을 떠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건이나 취향이나 지위 등에 몰입돼 있을 때 자신의 행위가 옳은지 분별하지 못한다. 이것은 어떤 생각과 행동이 한 곳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른바 자유의 상실을 가져오는 무서운 병이다.

자신이 원하는 좋은 자리로 영전한 사람들은 힘차게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출발점에 서 있는 100m 달리기 선수처럼 결승점을 바라보면서 달려야 한다. 결승점을 통과한 선수는 더 달릴 방법도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시작하는 날,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것을 얻은 날, 그날에 결승점을 바라보면서 달려야 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시작과 함께 곧 맞게 될 퇴장을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아름다운 청사진을 만드는 사람은 집착의 고통에서 해방된다. 시작에서 끝을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시작과 끝은 근본이 같다.

<여주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