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도 외면한 돈, 상가 권리금 해부] “권리금 폭탄 3번에 이민 고민 중” 가로수길 40대 상인의 눈물

입력 2014-01-14 02:33


8년 전 악몽이 되살아났다고 했다. 서울 강남구 가로수길에서 고깃집을 하는 유모(47)씨는 13일 건물주로부터 나흘 전 날아온 내용증명을 꺼내 보였다. ‘귀하는 부동산을 무단 점유하고 있으므로 속히 명도해 주시기 바란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아직 2년 계약 기간도 안 끝났는데 나가랍니다.”

2003년 장사를 시작한 뒤 벌써 세 번째 받는 내용증명이다. 지금 장사하는 곳은 2012년 임대차 계약을 했다. 지난해 12월 건물주가 바뀌자 한 달 만에 내쫓기는 신세가 됐다. 여기서 장사하려고 들인 권리금 1억9000만원과 인테리어 비용 5000만원이 고스란히 날아갈 판이다.

재개발로 터진 폭탄 두 방

평범한 회사원이던 유씨는 2003년 퇴직금을 털어 창업에 도전했다. 서울 광화문에 보증금 1억원, 권리금 1억3000만원, 인테리어 비용 5000만원을 들여 고깃집을 차렸다. 젊은층 취향에 맞게 꾸미고 좋은 재료를 찾아 시장바닥을 누볐더니 점점 자리를 잡아갔다. 2005년에는 분점을 냈고 손님이 줄을 섰다. ‘대박’이 난 듯했다. 노력을 보상받는 게 신이 나서 새벽 6시부터 가게에 나와 일했다고 한다.

날벼락이 찾아온 건 2006년이다. 본점과 분점이 있던 곳에서 차례로 도심 재개발 공사가 시작됐다. 건물주는 비싼 값을 받고 시공사에 건물을 넘겼지만, 유씨는 ‘귀하는 부동산을 무단 점유하고 있으므로…’란 통지서 두 통을 받았다. 본점과 분점 합쳐 권리금만 4억원을 날렸다.

유씨는 “(재개발 계획을) 잘 모르고 들어간 내 잘못이겠지만 너무 아쉬워서 공사장 주변을 한동안 배회했다”고 말했다. 이후 서울 동작구에 고깃집을 차렸다가 망하고 2010년 지인의 권유로 가로수길에서 다시 장사에 도전했다.

알짜 상권답게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권리금 2억원에 보증금 1억원, 월세 400만원으로 18평 가게를 열었다. 고기 장사 노하우가 제법 쌓여 1년여 만에 손님을 끌어모았다. 2012년 9월 근처 건물에 또 분점을 냈다. 당시 그 건물이 팔릴 거란 소문이 돌았지만 건물주는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계약했는데 지난해 12월 건물주가 바뀌었고 지난 9일 나가라는 내용증명이 날아온 것이다. 환산보증금 기준을 초과해 새 건물주가 재계약을 거부하면 그냥 나오는 수밖에 없다.

가로수길선 ‘권리금 빼먹기’도

유씨는 “가로수길은 특이한 상권”이라고 했다. 20평 넘는 점포에 입점하려면 부동산 수수료가 1000만원 이상 든다고 한다. 계약은 주로 1∼2년마다 하는데 대기업이나 유명 브랜드 점포는 예외여서 5년 이상인 경우가 많다. ‘큰손’ 임차인에게 통째로 건물을 빌려주면 건물값이 올라가고 관리도 잘 된다는 이유에서다. 또 재계약 때는 무조건 배 이상 임대료가 뛴다. 유씨는 “양도·양수는 전적으로 건물주 허락에 달려 있어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임대료를 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권리금 빼먹기’도 벌어진다. 유씨는 “우리 가게 근처의 한 건물주는 명도 소송을 내서 임차상인 내보낸 뒤 다음 임차인에게 시설비 명목으로 1억5000만원을 받았다”며 “권리금이 2억원인데 5000만원 싸니까 임차인도 군소리 없이 냈다. 상인이 받아야 할 권리금을 건물주가 받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얼마 전 주택을 개조한 상가는 지하 점포가 아직 비어 있다. 장사하던 상인이 없으니 원칙적으로 권리금이 없지만 이 건물주도 입점을 타진하는 이들에게 시설비조로 5000만원을 요구하고 있다. 유씨는 “권리금은 임차인 간의 거래라는 생각을 가로수길에 와서 버렸다”고 했다.

그는 “권리금 폭탄을 세 번째 맞는 거라 어떻게 될지 잘 안다. 어차피 질 싸움”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번에 쫓겨나면 미국이나 유럽으로 이민 가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고도 했다.

특별취재팀=태원준 차장 이도경 박세환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