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착한 사회를 위하여] 6급 공무원, 세상을 바꾸다
입력 2014-01-14 02:34
21개월 고군분투… 산재-건강보험 사각지대 해결한 권익위 최환영 조사관
지난해 11월 1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가정책조정회의. 정홍원 국무총리를 비롯해 각 부처 수장들 뒤에 비교적 젊은 얼굴의 6급 공무원이 앉아 있었다. 묵묵히 회의를 경청하던 이 공무원은 국민권익위원회 최환영(47·사진) 조사관이었다. 이날 그는 자신이 약 2년간 매달려 만들어낸 정책 개선안이 안건으로 상정되고 확정되는 과정을 벅찬 표정으로 지켜봤다.
최 조사관은 13일 “공무원 한 명은 나약하지만 의지만 있다면 총리가 주재하는 회의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2000년 서울시 7급 공채로 공직에 입문해 평범한 생활을 하던 최 조사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12년 2월.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권익위 사무실 안에서도 입김이 나올 만큼 칼바람이 불던 날 최 조사관에게 일거리 하나가 떨어졌다. 여느 때처럼 억울함을 호소하는 민원이었는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2006년 A씨는 자신이 일하던 농장에서 15㎏짜리 장비를 들다 뒤로 넘어져 디스크에 걸렸다. 산재 요양 처분은 받았으나 근로복지공단은 이듬해 말 A씨에게 요양 종결 처분을 내렸다. 허리 통증은 계속됐지만 산재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 A씨는 결국 2008년 6개월여간 건강보험으로 병원에 다녔다.
그런데 2011년 12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갑자기 A씨에게 부당이득금 반환을 청구했다. “왜 산재 환자가 건강보험으로 치료를 받았느냐”는 취지였다.
A씨는 최 조사관을 만나 “사고 이후 일도 못해 생계가 막막해졌다”며 “부당이득금을 낼 형편도 안 되고 왜 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울먹였다.
근로복지공단은 산재 치료가 끝났으니 더 이상 치료비를 부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두 공단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바람에 산재요양이 종결된 재해자가 후유증을 앓더라도 보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근로자 입장에서는 산재보험료, 건강보험료를 동시에 내고도 어느 쪽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비정상적 관행이었다. 실제로 2003년 6월부터 2013년 5월 사이 국가기관에 접수된 같은 내용의 민원은 6만4539건이나 됐다.
그간 권익위는 산재 후유증 치료비 문제를 개선하라고 공단 등 관계기관에 22차례나 시정 권고를 내렸지만 전부 묵살당했다. 권익위 권고가 강제성이 없는 탓이었다. 두 공단 관계자들은 최 조사관에게 “그동안 계속 이런 식으로 해왔는데 왜 바꿔야 하느냐”고 오히려 되물었다.
최 조사관은 공단과 정부 부처들을 직접 방문해 일선 공무원들의 의견을 모았다. 관계기관 회의만 20여 차례 열었고 150차례에 걸쳐 의견을 조율했다. 국무조정실도 두 번이나 찾았다.
지난해 말 마침내 “산업재해자의 산재요양이 종결된 시점부터 2년간은 근로복지공단이, 이후에는 건강보험공단이 치료비를 분담한다”는 합의안이 도출됐다. 눈여겨보던 이성보 권익위원장이 이 안건을 국가정책조정회의에 들고 갔다. 설명을 들은 정 총리는 “공공기관 갈등을 해결한 모범 사례”라며 극찬했다. 고용노동부는 4월 말까지 최 조사관의 개선안을 바탕으로 산재보험법 개정안을 내놓기로 했다. 일선 공무원이 민원 사례를 바탕으로 정책을 직접 만들어 법 개정까지 이끌어낸 사례는 처음이다.
개정법이 발효되면 과거 최장 10년간 부당하게 징수됐던 치료비 51억원도 다시 근로자들에게 반환된다. 권익위는 최 조사관을 ‘2013년 올해의 권익인’으로 선정하고 표창했다.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