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우 목사의 시편] 평화를 구하는 자여

입력 2014-01-14 01:34


몇 주 전 ‘○○선언’에 동참해 달라는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응답하지 않았더니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고 몇 가지 질문을 해보았다. ‘목사의 정치 참여는 언제, 어디까지 허락되는가?’ ‘나는 진보인가, 보수인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때에 설익은 한 사람의 입장 표명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 전화에 응대하지 않았다.

성서가 말하는 최고의 복은 ‘평화’이다. 히브리어로 ‘샬롬’의 어원적 의미는 ‘온전함’이다. ‘샬롬’과 어원이 같은 히브리어 동사 ‘실람’은 ‘빚을 갚다’ 또는 ‘물건 값을 지불하다’로 완전한 거래가 성사됨을 의미한다. 또한 질병의 치유와 건강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샬롬’은 형통한 삶을 말하는 것으로 영향력의 번영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샬롬’으로 인사를 나눈다. 단순한 인사말에 머물지 않고 자신과 자신,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규명한다. 그러니까 자연,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높은 차원의 신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시국선언, 우국선언은 양측 모두 민족공동체를 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던가. 얼마 전 한 신부의 시국선언을 두고 지상파 방송에서 대담이 벌어졌다. 듣다 보다 화가 나서 TV를 껐다. 다른 관점에 대한 배려는 어느 쪽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양측 모두 자신만의 주장이 옳다고 했다. ‘샬롬’이 사용된 성경 용례에서는 ‘하나도 빠짐이 없는 수적 온전함’(렘 13:19)을 말한다. 누군가의 희생 없이 평화는 정착될 수 없다. 리더들은 국민 ‘한 사람도 빠짐이 없는 수적 온전함’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국민을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정치의 책임이다. 국정원 정치 개입, 종북 논란에 대한 해석 차이 등 어느 것 하나 ‘온전함’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철도노조는 파업을 풀었다. 바로 야당 정치인이 여당 정치인에게 건넨 한마디의 말에서 시작되었다. “형님! 이대로 두시겠습니까?”

이제 회사는 오랜 노동운동에 지친 그들의 사랑방이 되어야 한다. 노측이 법을 어겼다면 인자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법 해석의 잣대를 말하는 것이다. 강한 자에게 강하게, 약한 자에게 약하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 엄정한 기준과 해석은 서로가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평화가 찾아온다.

이 시대의 ‘큰 형님’ 넬슨 만델라는 무장투쟁단체 ‘민족의 창’이 민족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가장 위대한 무기는 평화”라고 했다. 어떤 이유로도 폭력은 용납될 수 없다. 약자의 마지막 항변인 폭력 역시 허용되어선 안 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강자의 기득권이 더 무서운 폭력이다. 갈등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면 양보는 조금이라도 더 가진 자의 몫이어야 한다. 자기 부인은 없고 자기 의만 난무한 시대에 구인광고라도 내야 하나 보다. ‘평화를 구하는 자를 찾습니다.’

<일산 로고스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