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만호 (15) “기독인 1000만명 넘는데 기독문학잡지 없다니…”
입력 2014-01-14 02:31
아가페서적을 시작으로 크리스챤서적이 태동됐다. 출판사업의 원동력은 새벽기도회에서 나왔다. 크리스챤서적에서는 600여종의 기획출판과 타 출판사 15개의 총판을 했다. 그동안 약 800만권을 보급했고 현 시가로 약 48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1996년 어느 날 한국아동문학회장을 지낸 김신철 선생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한국문인협회 아동분과 위원장으로 계실 때 한국시에 나를 추천해주셨던 분이다. “자네가 출판으로 돈을 좀 벌었다는 소문을 들었네. 한국 기독교인이 1000만명을 상회하는데 월간 기독문학 잡지가 하나도 없으니 정말 안타까운 노릇이네. 이 일을 한번 해보시게.” 김 선생님은 세 번이나 나를 찾아오셔서 협박 아닌 협박을 하셨다.
김 선생님을 뵙고 나니 고등학교 문예부장과 ‘기독시보’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학교 교지를 맡아 만들던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몇 분과 문예지 출판을 논의했다. “기독 문학잡지를 내놓으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적자가 뻔합니다.” “누가 그걸 보겠어요.” “하지 마세요. 망합니다.” 주변 모든 분이 만류했다. ‘월간 목회’ 발행인 박종구 목사님과 고등학교 친구들만 한번 해보라는 정도의 말을 했다.
고민은 갈수록 깊어졌다. 이유는 한국문학의 현주소 때문이었다. ‘지금 하는 출판사 일에 조금만 업무를 더하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적자를 예상하니 막막했다. 기도를 시작하고 3개월이 지나 문학을 통해 선교를 하시도록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한국현대사에서 문학의 변천을 종교적으로 분석해볼 때 고려 474년 역사는 불교사상이 배경이다. 조선 500년을 지배한 유교사상 때문에 문학도 권선징악의 흐름을 이어간다. 이런 배경에서 신문, 잡지, 일반 매체들은 불교나 유교적 문학작품은 보편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유독 기독교적 작품은 종교적이라는 이유로 게재를 꺼린다. 노벨문학상의 70% 이상을 유럽과 미국 작가들이 수상한 것도, 문학상 심사위원들이 기독교적 문화권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문학도 서양에서 더 발전했다.’
그렇게 ‘창조문예’가 시작됐다. 1997년 1월 출판 등록을 하고 2월에 창간호를 내놨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IMF 구제금융 사태를 맞았다. 발행에 어려움이 커져 페이지를 3분의 1 정도 줄였더니 기독교 작가나 신앙시를 쓰는 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우리들의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이 ‘창조문예’뿐인데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을 보니 안타깝습니다. 장로님, 어려우시더라도 용기를 내십시오!” 그러나 이자는 계속 눈덩이처럼 커졌다. 구제금융 사태가 터지기 2개월 전 삼성동의 현재 건물을 매입해 은행 부채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업이 이러다 망하는구나.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잠이 오지 않았다. 힘이 빠지고 피가 말랐다.
신문들이 IMF 구제금융 관련 기사로 도배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사장님, 신기한 전화가 한 통 걸려왔습니다. 우리가 만든 전집 250세트를 누가 구입하겠답니다.” “뭐라고? 250세트나?”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전집물 월부 사업을 하는 사람이 우리가 만든 39권짜리 ‘알버트 반즈 주석’을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