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권리금 폭탄 돌리기
최준혁(55)씨는 서울 홍익대 앞에서 곱창집을 하고 있다. 곱창 장사 25년에 특유의 냄새를 말끔히 없애는 노하우가 생겨 단골이 많다고 한다. 다른 데서 장사하다 2011년 3월 홍대 앞의 아담한 2층 건물로 이전했다. 보증금 1억원에 월세 700만원. 예전 상인에게 권리금 2억원을 줬고 1·2층 인테리어에 1억7000만원을 들였다. 중심 상권에서 ‘승부’를 해보자고 상당한 빚을 얻어 투자했다.
#“내가 나가면 건물주는 앉아서 3억원쯤 번다”
계약 기간은 2년이었다. 상가 임대차 계약은 통상 1∼3년마다 갱신하며 임대료를 조정한다. 재계약을 앞둔 2012년 11월 건물주가 갑자기 이 건물을 팔았다. 최씨는 팔린 것도 몰랐다가 새 건물주로부터 계약 기간이 끝나면 나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자신이 직접 여기서 장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나갈 경우 최씨의 권리금 2억원은 고스란히 증발한다. 다음 임차인에게 받아야 하는 권리금은 건물주가 “내 건물 내가 쓰겠다” 하는 순간 ‘폭탄’으로 돌변한다. 법에 명시되지 않은 임차인 간의 거래 관행이어서 현행법상 건물주에겐 권리금을 물어줘야 할 아무런 책임이 없다.
최씨는 “내가 나가면 새 건물주는 앉아서 3억원을 손에 쥐게 된다”고 말했다. 어떤 상인이 장사를 잘해서 그 점포, 그 거리를 찾는 이가 많아지면 다음 상인은 장사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최씨는 그 무형의 가치를 인정해 권리금을 주고 점포를 넘겨받았다. 2년간 장사하며 손님이 더 늘어 지금은 권리금 3억원에도 들어오려는 상인이 있다. 새 건물주는 이 3억원짜리 가치를 공짜로 차지하게 됐다는 뜻이다.
상가임대차보호법은 임차인에게 5년간 계약갱신요구권을 준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환산보증금(보증금+(월세×100))이 일정 기준(서울 4억원, 광역시 2억4000만원 등) 이하인 작은 점포 임차인에게만 적용된다. 최씨는 이 기준을 초과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불과 2년 만에 명도소송(점유하고 있는 점포를 돌려 달라고 건물주가 제기하는 소송)을 당했다.
#권리금은 홍길동 같은 돈… 내 자식은 맞는데 호적엔 없어
그렇다면, 상가임대차보호법이 적용되는 환산보증금 기준 이하의 점포 권리금은 얼마나 안전할까.
신가람(32)씨는 2012년 11월 홍대 앞 후미진 골목의 단독주택 반지하 18평 공간을 빌려 ‘뿅뿅뿅’이란 주점을 차렸다. ‘신가람 밴드’의 보컬로 인디음악을 해오다 작은 문화공간을 만들어 보려고 시작했다.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 90만원. 환산보증금은 3000만+(90만×100)=1억2000만원이다. 계약 당시 기준인 3억원(법이 개정돼 올해부터 4억원이 됐다)에 못 미쳐 법의 보호를 받는다.
하지만 신씨는 지난해 9월 명도소송을 당했다. 건물주는 점유이전금지 가처분신청을 함께 냈고 법원이 받아들여 지금 그의 점포에는 법원 집행관이 가져온 양도 금지 ‘딱지’가 붙어 있다. 이 점포를 신씨가 다른 상인에게 넘길 수 없다는, 다시 말해 권리금을 받을 수 없게 됐다는 표시다.
신씨도 건물이 팔린 경우였다. 개업 6개월 만에 부동산에서 건물주가 바뀌었다고 연락이 왔다. 새 건물주는 월세를 150만원으로 올리고, 옛 건물주 동의 아래 설치한 조명과 간판 등 외부 구조물 철거를 요구했다. 거부하자 구조물이 건축법에 저촉돼 계약 해지 사유라며 명도소송을 낸 것이다.
신씨는 가정집이던 곳을 6000여만원 들여 점포로 개조했다. 전에 장사하던 상인이 없는데도 권리금 1000만원을 내야 했다. 중개한 부동산은 이를 ‘바닥권리금’이라고 불렀다. 개업 당시 그 골목엔 ‘뿅뿅뿅’을 포함해 점포가 2개뿐이었다. 밤이면 가게 불빛이 없어 캄캄했던 곳인데 지금은 카페와 주점 등 10개 넘게 들어섰다.
이 골목 상인들은 대부분 개업 전에 신씨 가게를 답사했다. 주말엔 빈 자리가 없고 평일에도 손님이 이어지는 걸 보고는 여기에 터를 잡았다. 신씨의 투자와 영업이 창출한 골목상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유일한 방법이 권리금인데 그는 그럴 기회를 박탈당하게 됐다.
“권리금은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 같은 돈이에요. 분명 내 자식인데 호적에 없으니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해요. 만약 ‘뿅뿅뿅’을 지금 다른 상인한테 넘기면 최소한 수천만원은 권리금을 받을 텐데… 건물주들은 ‘양도하게 해주겠다’고 말만 하다 명도소송을 내곤 하죠.”
신씨의 건물주는 이에 대해 “월세 인상을 직접 요구한 적이 없고, 구조물은 구청에 문의한 결과 도로를 점유해 불법이라는 판단이 나와서 철거해 달라고 했던 것”이라며 “원만히 풀어보려 했으나 신씨가 계약서에 권리금 부분을 명시해 달라고 요구해 접점을 찾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명도 소송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나도 자영업자여서 신씨의 상황을 이해한다. 지금도 잘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덧붙였다.
#임차상인 ‘권리금’, 건물주의 ‘권리’가 되다
“건물주들이 ‘양도하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양도하게 해주다’는 다음 임차인에게 권리금 받고 점포 넘길 기회를 허락한다는 뜻이다. 임차인이 권리금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건물주 마음에 달려 있다는, 그러니까 권리금 폭탄의 스위치를 건물주가 쥐었다는 얘기가 된다. 서울 종로구청 앞에서 중국집 ‘신신원’을 운영하는 신금수(53)씨도 같은 말을 했다.
그는 지난달 말로 임대차 계약 기간이 끝났는데 이달 들어 밤마다 가게에서 자고 있다. 건물주는 점포를 빼라 했고 그는 권리금도 못 받고 나갈 순 없다며 맞섰다. 환산보증금 기준을 넘어선 데다 18년째 여기서 장사해온 터라 상가임대차보호법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건물주의 법적 조치도 끝나 언제든 집달관이 들이닥칠 수 있다. 그걸 막아보겠다며 싸우는 중이다.
신씨는 중학교 졸업하고 상경해 큰형님이 하는 중국집에서 배달부터 시작했다. 짜장면 뽑는 기술을 배워 주방장이 됐을 때 분가해서 1995년 이 가게를 차렸다. 보증금 2000만원에 월세 200만원, 권리금 1억3500만원을 주고 들어왔다. 형님과 친척들한테 1억원을 빌렸다.
장사가 신통치 않아 상인이 자주 바뀌던 점포였다. 그런 곳에서 18년을 버티며 많은 단골을 확보했다. 권리금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는 속성이 있다. 오래 장사했다는 건 그 점포를 약속장소로 삼았거나, 거기서 잊지 못할 추억을 얻었거나, 그 거리를 기억하는 랜드마크로 여긴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이 점포의 지금 권리금 시세는 1억5000만원이 넘는다. 신금수씨는 2년 전 점포 양도하고 나가겠다는 의사를 건물주에게 전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건물주가) 월세를 700만원에 맞춰놓고 나가라는 거예요. 당시 내 월세가 320만원이었는데 배 이상 올려놓으라는 겁니다. 그게 안 되면 다음 상인과 계약을 해주지 않겠다는 거죠. 누가 월 700만원에 들어오겠어요. 그렇다고 그냥 나가면 권리금을 못 받잖아요. 하는 수 없이 눌러앉았죠.”
그러고 한참 뒤 건물주에게서 내용증명이 날아왔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자신이 점포를 쓰려 하니 비워 달라는 거였다. ‘내 건물 내가 쓰겠다’라는 권리금 폭탄 스위치를 눌러버린 것이다.
#상가 명도소송 1년에 1만5000건… “법대로 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
권정순 서울시 민생경제자문관은 변호사다. 서울시가 민생 대책을 총괄토록 신설한 자리에 공채로 발탁됐다. 권리금을 비롯해 임차상인 문제를 풀기 위한 태스크포스팀도 주관하고 있다. 얼마 전 울산에 사는 친척이 그에게 자문을 구해왔다고 한다.
친척은 조그마한 피자집을 하고 있다. 권리금 2000만원을 주고 점포를 얻었는데 맛이 좋았는지 장사가 아주 잘됐고 단골도 많이 생겼다. 환산보증금 기준 이하여서 상가임대차보호법이 적용된다. 법이 정한 보호기간 5년이 지나자 건물주가 재계약을 거부했다.
“그 점포에서 장사를 더 하고 싶다, 정 안 되면 양도라고 하면 좋겠다, 양도하면 권리금 5000만원은 받을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좋냐 하더군요. 제가 변호사에다 민생경제자문관이라니까 방법을 알겠다 싶어 전화한 거였는데 ‘어쩔 수 없다. 도리가 없다’ 그랬어요. 계속 장사하면 괜찮은 브랜드로 클 수도 있는 자영업자들이 이렇게 길어야 5년 만에 권리금 폭탄 맞고 좌절하는 게 현실입니다. 이런 마당에 정부가 창업을 장려한다? 앞뒤가 안 맞는 거죠.”
2012년 ‘건물 명도 및 철거’ 관련 소송은 모두 3만3396건이 제기됐다. 전체 민사소송의 11%나 된다. 대법원 관계자는 “그중 절반가량이 상가 임대차와 관련된 분쟁”이라고 했다. 해마다 법원에 권리금이 얽힌 임대차 분쟁 1만5000건 이상이 접수되고 있다는 얘기다. 권 자문관 친척처럼 법원까지 가지도 못하는 경우를 감안하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게 분명하다.
특별취재팀 wjtae@kmib.co.kr
[법도 외면한 돈, 상가 권리금 해부 ①] 권리금 2억 들인 가게… “나가라” 한마디에 한푼도 못 건져
입력 2014-01-13 02:35 수정 2014-01-13 1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