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스케이팅 시작과 끝인 음악의 비밀] 여왕은 탱고 타고 납시어 탱고로 피날레

입력 2014-01-13 01:32


피겨스케이팅이 ‘동계 스포츠의 꽃’으로 불리는 것은 스포츠와 예술이 결합된 특징 때문이다. 대부분 종목들이 기록 경기인데 비해 음악에 맞춰 퍼포먼스를 펼치는 피겨는 기술적인 요소와 예술적인 요소를 함께 평가한다. 특히 스케이터들의 기술적 숙련도가 높아진 현대 피겨에서 예술성은 더욱 중시된다. 기술적인 부분 뿐아니라 안무 소화력과 곡 해석력 등 예술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김연아는 현대 피겨가 지향하는 모델이다. 따라서 피겨에서 예술성의 핵심인 안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안무를 여러 요소들의 배열이 아니라 독창적인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데 있어서 기본은 바로 음악이다. 안무가 음악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좋은 선곡이야말로 좋은 퍼포먼스의 출발점이다. 피겨 음악은 기본적으로 선수와 코치, 안무가가 연기의 컨셉트를 고려해 함께 선정한다. 피겨가 원래 발레에서 시작된 스포츠여서 과거에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등 발레음악이나 왈츠 등 춤곡을 많이 사용했으나 요즘엔 팝송, 영화음악, 뮤지컬, 오페라, 클래식까지 다양하게 사용된다. 다만 국제빙상연맹(ISU) 규정상 피겨 음악은 가사가 들어가지 않은 곡만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스댄싱은 가사가 있는 곡을 사용해도 된다.

예술성이 높은 안무를 지향하는 요즘 선곡에서 중시되는 것은 선수가 쇼트프로그램 2분40초와 프리스케이팅 4분10초 동안 뚜렷한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예전에는 여러 곡을 짜깁기해서 사용했으나 요즘에는 줄거리가 있거나 주인공이 설정된 하나의 곡을 애용하는 편이다. 그래서 캐릭터가 분명한 발레음악 ‘백조의 호수’,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교향모음곡 ‘세헤라자데’ 등이 자주 선택된다.

특히 ‘카르멘’은 거의 매 시즌 여자 싱글에 사용되고, 남자 싱글, 페어, 아이스댄싱에도 자주 나온다. 여자 싱글에선 자유롭게 사랑하는 여주인공 카르멘, 남자 싱글에선 사랑 때문에 파멸하는 남주인공 돈 호세나 그의 연적인 용맹한 투우사 에스카미요의 캐릭터로 등장한다. 물론 페어와 아이스댄싱에선 남녀 캐릭터가 함께 등장한다.

‘카르멘’은 1980년대 피겨 여왕인 카타리나 비트(구 동독)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88년 캘거리올림픽에서 여자 싱글 2연패를 노리던 비트와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데비 토마스(미국)가 나란히 프리스케이팅에서 ‘카르멘’을 선곡했다. 당시 언론은 여자 싱글을 ‘카르멘의 전쟁’으로 불렀는데, 결국 승리는 카르멘을 관능적으로 연기한 비트에게 돌아갔다. 게다가 당시 페어 부문에서는 전설적인 콤비였던 세르게이 그린코프-예카테리나 고르디예바(구 소련)가 이 음악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비트 이후에도 미셸 콴, 샤샤 코헨(이상 미국) 등 유명한 여자 싱글 선수들이 이 곡을 택했지만 팜므파탈의 이미지가 강렬했던 비트의 그림자를 넘지는 못했다.

김연아 역시 캐릭터를 잘 드러낼 수 있는 음악을 즐겨 선택했다. 시니어 데뷔 무대였던 2006∼2007 시즌 프리스케이팅에서는 영국 작곡가 랄프 본 윌리엄스의 ‘종달새의 비상’을 선택해 이제 갓 세상에 나와 날갯짓을 시작한 종달새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시켰다. 이후에도 김연아는 뮤지컬 ‘미스 사이공’을 통해 가슴 아픈 사랑을 하는 여주인공 킴이 됐으며, ‘세헤라자데’에서는 아라비아의 신비스런 왕비가 됐다. 또 ‘007 메들리’에선 본드걸, ‘뱀파이어의 키스’에선 뱀파이어에 물린 여인 등으로 캐릭터를 구축했다. 특히 이들 음악을 차례차례 들으면 김연아가 선수로서 성장하는 모습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그려진다.

반면 ‘교향곡 00단조’ ‘협주곡 XX장조’ 등의 표제조차 없는 클래식은 피겨에서 그리 선호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선수가 드라마틱하게 연기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피겨 역사를 되돌아보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러시아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경우 교향곡과 협주곡이 종종 피겨 음악으로 쓰였다. 1997∼1998시즌 콴이 프리스케이팅에서 피아노 협주곡 3번과 피아노 3중주를, 2009∼2010시즌 아사다 마오(일본)가 프리스케이팅에서 프렐류드(전주곡) ‘종’을 선택했다. 그런데, 콴과 아사다 모두 연기가 무거운 음악을 쫓아가기 급급했고, 결국 은메달에 그쳤다.

김연아의 경우 2010년 밴쿠버올림픽에서 조지 거슈인의 ‘피아노 협주곡 F장조’를 사용했지만 최고의 프리스케이팅 프로그램을 만들어냈다. 사실 이번 시즌에도 프리스케이팅에 사용된 피아졸라의 탱고곡 ‘아디오스, 노니노’가 너무 어려운 곡이어서 올림픽 시즌엔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김연아가 멋진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이런 우려는 많이 가라앉았다.

김연아는 그동안 시니어 데뷔 이후 선곡은 대부분 전담 안무가인 데이비드 윌슨(캐나다)이 제안을 하면 자신이 최종 결정을 내렸다. 다만 윌슨도 밴쿠버올림픽이 있던 2009∼2010시즌엔 선곡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는데, 70년대 세계피겨선수권대회 3연패를 했던 안무가 산드라 베직(캐나다)의 제안으로 ‘피아노 협주곡 F장조’와 ‘007 메들리’를 선곡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연아는 처음에 윌슨에게 ‘007 메들리’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007 음악은 그동안 자유로운 갈라쇼에서나 사용되는 곡인데다 올림픽 시즌에는 보수적으로 선곡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연아는 “음악을 직접 듣고 나서 마음을 바꿨다”고 밝혔다.

반대로 김연아가 적극적으로 선곡에 관여한 경우도 있다. 2010∼2011시즌 한국 민요 ‘아리랑’을 토대로 한 프리스케이팅 ‘오마주 투 코리아’나 이번 시즌 쇼트프로그램인 스티븐 손드하임의 ‘어릿광대를 보내주오’가 대표적이다. 김연아는 밴쿠버올림픽 이후 자신을 응원해 준 한국 국민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오마주 투 코리아’를 준비했고,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지난 세월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담은 ‘어릿광대를 보내주오’를 선택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