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무죄 가른 ‘진술의 힘’] 떨고 있는 윗분들… 들었다∼ 놨다∼ 무서운 회장님의 입
입력 2014-01-11 01:35
이제는 현판을 내린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2011년 하반기부터 저축은행 비리 수사에 착수했다. 중수부에 소환된 회장들의 입에서는 거물들 이름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이상득 정두언 윤진식 공성진 이광재 김희중 임좌순 은진수 김광수 김두우 박지원 이철규 임종석 이석현 등이었다. 검찰은 모두 213명을 기소했다. 그 가운데 금품수수는 76명, 거물급만 20여명에 달했다. 중수부만이 할 수 있는 규모의 수사였다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민주당 박지원 의원,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 김광수 전 금융정보분석원장, 이철규 전 경기경찰청장 등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언론의 비판처럼 검찰이 무리한 수사를 한 것일까. 아니면 법원이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들이댄 것일까.
20증인 소환 일정을 조정하라
12∼2013년 수감 중이던 저축은행 회장들은 바빴다. 유동천 전 제일저축은행 회장, 임석 전 솔로몬저축은행 회장, 김찬경 전 미래저축은행 회장 등은 2년 내내 이 법정 저 법정을 돌아다니며 증언했다. 누구에게 돈을 줬고, 돈을 준 시기와 장소, 주변 상황까지 설명해야 했다.
수십건의 저축은행 금품수수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합의부 재판장들도 고민이었다. 모든 재판에는 회장들의 증언이 필요했다. 회장들은 검찰 조사에서 여러 명의 거물에게 돈을 줬다고 진술했기 때문이었다. 재판장들은 다른 재판부의 재판과 일정이 겹치지 않게 증인을 부르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했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부장판사는 “다른 재판장들과 함께 식사 시간에 달력을 두고 증인 소환 날짜를 조정했다”고 말했다.
수의 입은 회장 입에 엇갈린 거물들의 운명
금품수수 사건은 대개 현금이 오간다. 계좌추적도 소용없고, 증거물도 남아 있지 않다. 범죄 혐의를 뒷받침하는 직접증거가 나오기 어려운 구조다. 때문에 돈을 준 사람의 진술이 유일한 증거가 되는 경우가 많다. 저축은행 회장들이 돈을 줬다고 진술한 사람의 수만큼 법정에서 증언해야 했다.
진술은 기억에 의존하지만, 기억은 늘 불확실하다. 문제는 법정에서의 진술은 일관적이면서도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최연희 전 의원은 유동천 전 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유 전 회장은 “2008년 국회의원 선거 전에 충주, 영월을 거쳐 동해시에 가서 뉴동해관광호텔 인근 도로변에서 피고인을 만났다. 피고인을 차에 태워 선거 등에 관한 얘기를 나눈 다음 2000만원이 든 쇼핑백을 건넸다. 피고인은 쇼핑백을 받아 차에서 내린 뒤 자신이 타고 온 차를 타고 돌아갔다”고 증언했다. 재판부는 “비교적 일관되고 구체적인 진술”이라고 판단했다.
반면 애매하고 오락가락하는 진술은 유죄의 증거가 되지 못했다. 최 전 의원은 2007년과 2009년 유 전 회장으로부터 2000만원씩 받은 혐의도 받았다. 유 전 회장의 지시를 받아 최 전 의원에게 줄 돈을 마련했다는 장모씨는 법정에서 “2007년 돈을 준비할 당시 날씨가 따뜻했다”, “2009년은 조금 더 더웠다”는 식으로 진술했다. 재판부는 “막연하게 기온 등의 느낌에 의지해 돈을 마련해 준 시기를 특정하고 있다”며 믿을 수 없는 진술이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2008년 2000만원 수수 부분만 유죄로 인정했고, 2007년과 2009년의 혐의는 인정하지 않았다.
변호인들은 금품 공여자의 진술을 흔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꼬치꼬치 캐묻고 헷갈리게 묻는다. 증인이 머뭇거리거나 말이 꼬이면 검사의 얼굴은 굳어진다. 임좌순 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의 변호인은 김찬경 전 회장에 대해 “과거 가짜 서울법대생 행세를 했고, 은행 영업정지 직전 밀항을 시도했다”며 공격했다. 임 전 사무총장은 지난해 징역 10개월을 확정받았다.
진술에만 의존한 수사는 인정 못 받아
법원도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금품수수 사건의 어려움을 인정한다. 하지만 형사소송법상 대원칙인 무죄추정의 원칙이 현실적 어려움보다 우선한다. 검찰은 구체적이고 믿을 만한 여러 간접증거들을 제시해 금품 공여자의 진술을 증명하는 방법을 택하곤 한다.
정형근 전 의원은 유 전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지 않았다고 법정에서 주장했다. 변호인단도 유 전 회장의 진술 흔들기에 주력했다. 재판 분위기를 뒤집은 것은 검찰이 제출한 CCTV 녹화영상이었다. 유 전 회장의 집무실 앞을 촬영한 영상에는 유 전 회장의 지시를 받은 장씨가 쇼핑백 두 개를 들고 집무실에 들어갔다 빈손으로 나오는 장면이 담겼다. 뒤이어 정 전 의원이 나오고 유 전 회장과 그의 비서가 캐리어를 끌고 나간다. 캐리어에 돈을 넣어 줬다는 유 전 회장의 진술이 ‘증명’된 셈이다. 정 전 의원 측은 이후 법정에서 “1억원이 아니라 5000만원이었다”며 수수 금액을 줄이는 데 노력했다. 정 전 의원은 벌금 800만원을 선고받았다.
윤진식 의원은 영수증에 발목이 잡혔다. 유 전 회장 일행이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받은 영수증과 휴대전화 발신 지역이 유 전 회장이 진술한 범행 지역과 일치했다. 유 전 회장이 기억하는 풍경을 증명하기 위해 윤 의원이 살던 아파트의 면적, 거주기간 등도 증거로 제출됐다. 윤 의원은 유 전 회장으로부터 4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1심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주변 인물들의 진술도 중요하다. 저축은행 회장들은 직접 돈을 마련하기보다 주로 은행 임직원들에게 돈 마련을 지시했다. 때문에 임직원들의 진술이 회장의 진술과 얼마나 일치하는지가 중요했다.
유 전 회장은 누군가에게 돈을 주고 나면 그 사실을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유 전 회장의 6년지기 친구라는 박모씨의 증언은 일부 피의자들의 유무죄를 가르는 데 주요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돈 줬다는데 어떻게 기소를 안 하냐”
박지원 의원은 임석 전 회장으로부터 8000여만원을 수수했다는 혐의에 대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임 전 회장으로부터 4000만원을 수수했다는 혐의를 받았던 이석현 의원도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화영 전 의원, 이철규 전 경기경찰청장 등도 지난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모두 금품 공여자 등의 진술이 흔들리거나 진술을 뒷받침할 증거들이 없어서였다. 박 의원의 무죄를 이끌어낸 노영희 대한변호사협회 수석대변인은 “검찰이 확실한 증거도 없이 강도 높은 수사에 지친 금품 공여자의 진술만으로 무리하게 기소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검찰도 할 말은 많다. 돈을 줬다는 진술을 확보했는데, 직접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기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법원의 증거 판단에 대해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며 “같은 사람의 진술을 두고 어떤 재판부에서는 유죄 판단을 내리고 다른 재판부에서는 무죄 판단을 내린다”고 말했다. 재판부마다 같은 공여자의 진술을 두고 신빙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일관적이지 않다는 불만이다. 임 전 회장이 금품 공여자인 사건의 경우 이상득 전 의원과 정두언 의원, 김희중 전 청와대 부속실장에게는 유죄가 선고됐지만 박 의원과 이 의원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관계자는 “진술에 어떤 유의미한 차이점이 있는지 검토해 상급심에서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