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여가생활] 쉬는 것도 경쟁력… 알아야 잘 쉰다
입력 2014-01-11 02:36
회사원 K씨(48)는 주말을 주로 TV시청으로 소일한다. 비용이 거의 들지 않을 뿐 아니라 주중에 보지 못했던 드라마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하지만 여행 관련 프로그램이나 야외활동을 소재로 한 TV 프로그램이 나올 때면 당장이라도 야외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절절하다. 최근 들어 이 같은 TV 프로그램이 부쩍 늘어나는 것 같아 가족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TV 시청이 제일 즐거워요”=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조사한 2012년 국민여가활동조사에 따르면 국민들이 가장 많이 참여한 상위 10개 여가활동 중 ‘TV 시청 및 라디오 청취’가 1위로 나타났다. 무려 45.6%의 응답자가 ‘TV 시청과 라디오 청취’를 1순위로 꼽았다. 나머지 9개 여가활동 중 ‘인터넷 검색 및 채팅’과 ‘산책’에 각각 7.2%와 6.2%가 1순위로 답변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5% 미만이었다.
전문가들은 TV 시청과 같은 소극적이고 정적인 여가생활은 단기적으로 만족도가 높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여가만족도가 떨어진다고 경고한다. 실제로 2012년 국민여가활동조사 결과 가장 만족스러운 여가활동 1위에도 ‘TV 시청과 라디오 청취’가 꼽혔다.
최석호 여가경영연구소장은 “특히 경기가 좋지 않을 때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TV 시청이 여가 순위에서 늘 1위를 차지한다”며 “국민행복 차원에서 보면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여가생활이 소극적이고 정적인 여가생활에 비해 만족도가 높은 법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K씨처럼 비용을 생각해 현재는 TV 시청에 만족하고 있지만 내심은 당장이라도 바깥으로 달려가고 싶은 사람이 많다. 여가활동조사에서 국민들이 향후 하고 싶은 여가활동으로는 ‘영화 보기’(41.4%)가 가장 응답 비율이 높았고, 그 다음으로 ‘해외여행’(31.4%), ‘스포츠경기 직접 관람’(18.7%)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행하는 상위 10개 여가활동 중 ‘영화 보기’는 ‘헬스’에 이어 7위에 머물러 있다.
실제 여가활동과 희망하는 여가활동의 격차는 주로 시간과 경제적인 문제 탓에 빚어진다. 경제상황에 어려워지면서 그만큼 놀 시간과 노는 데 드는 비용을 줄이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2012년 15세 이상 우리나라 국민들의 하루 평균 여가시간은 평일 3.3시간, 휴일 5.1시간으로 나타났다. 이는 2010년의 평일 4시간, 휴일 7시간보다 각각 0.7시간과 1.9시간 감소한 것이다. 한 달 평균 여가비용이 12만5000원으로 2010년 16만8000원보다 4만3000원 정도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는 것도 배워야=한국인들이 아직도 TV 시청, 산책, 인터넷 검색 등 소극적인 여가활동으로 만족하는 데는 어릴 때부터 여가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윤소영 여가민간투자센터장은 “어렸을 때 여가경험이 중년기 여가생활 재현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며 “과거 세대와 달리 현재 젊은이들은 방과후 프로그램이나 특기적성교육 등을 받아 훨씬 적극적인 여가생활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선행학습을 위해 학원을 다니느라 마음껏 뛰놀 수 없다. 물론 공교육에 미술, 음악, 체육시간도 있고, 예체능 학원에도 많이 다니지만 기본적으로 여가생활이 아닌 학습이란 개념이 바탕에 깔려 있다. 중·고교에 와서 대다수 학생들은 입시에 찌들어 여가생활은 아예 잊어버린다.
적극적으로 여가생활을 즐기기 위해서는 일정한 숙련이 필요하다. 난이도가 높은 여가생활일수록 몰입도가 높고, 따라서 만족도도 높다. 스키장에서 상급자 코스에서 타는 사람이 초급자보다 만족도가 높은 것과 같다. 창의적인 인재가 절실히 요구되는 현대사회에서 어릴 때부터 여가교육을 착실히 실시하는 것이야말로 미래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바탕이 된다는 지적이 있다.
◇봉사활동도 훌륭한 여가활동=놀고 즐기는 것만 여가활동이 아니다. 학계에서는 자원봉사활동을 ‘사회성 여가활동(social leisure)’이라며 크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2012년 통계는 봉사활동 참여 경험이 있는 사람은 11.9%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57.3%가 주로 불우이웃 시설 자원봉사에 참여한 것으로 집계됐다.
봉사활동은 대부분이 여가시간인 은퇴자들에게 그만이다. 여가시간이 많은 데다 일생 가꿔온 특기를 살리면 봉사할 기회가 널려 있다.
가천대 이봉 스포츠문화대학원 원장은 “선진국에서는 학생들의 체육활동에 학부모가 코치로 참여하는 등 이른바 재능기부로 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특히 은퇴자들은 사회경험과 여가시간이 많기 때문에 이타적 여가활동을 하는 것이 여가생활의 만족도를 높이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서완석 국장기자 wssuh@kmib.co.kr
국회 통과 앞둔 ‘여가기본법’은…
일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처럼 여가를 즐길 권리도 인정받을 수 있을까. 여가권도 국민의 권리이고 국가가 이를 뒷받침할 책무가 있음을 규정한 ‘국민여가활성화 기본법안(이하 여가기본법)’이 발의돼 국회 본회의 통과를 앞두고 있다. 여가기본법은 ‘여가활동과 휴식은 시간낭비’라는 기존 관념에서 벗어나 ‘좋은 휴식=재창조’라는 인식을 법적으로 인정하자는 취지다.
여가기본법 제정에 힘써온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윤소영 센터장은 “국민의 여가권을 국가가 인정한 것 자체가 의미가 크다”며 “아직은 선언적인 의미만 담고 있지만 후속으로 입법화될 여가진흥법에서는 구체적인 시책들이 담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학계와 정부, 정치권이 7년여의 노력 끝에 만든 여가기본법은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국민 행복추구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법이다. 이를 위해 여가기본법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여가시설과 공간을 확충토록 법제화하는 한편 여가전문인력을 양성하고 여가프로그램을 개발·보급하도록 했다. 또 여가문화 활성화를 위한 기본계획 수립 및 중요사항 심의를 위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아래에 각부 차관들로 구성되는 여가위원회를 두도록 했다. 여가위원회는 각부에 흩어진 여가관련 정책을 통합 심의·의결하게 된다. 여가기본법은 이와 함께 여가활성화를 위해 여가교육을 학교 및 관련 시설 등에서 실시하고 장애인, 노인, 저소득층, 다문화가정 등 사회적 약자의 여가활동 증진에 힘쓰도록 했다.
이 같은 여가기본법 제정은 한국인들이 국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일은 가장 많이 하면서 행복하지 않다는 데서 출발했다. 주5일 근무제가 본격 실시됐지만 청소년들의 여가활동은 외면 받고 있고, 노인 여가에 대한 국가적 관심도 미흡했다. 여가산업이 미래의 새로운 경제성장 동력이 될 것이란 전망도 여가기본법 제정의 배경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