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박준범] ‘금단의 땅’이 된 예멘… 못다한 선교는 아직도 그리움으로
입력 2014-01-11 01:34 수정 2014-01-11 10:51
한국인터서브선교회 대표 박준범 선교사
국제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이 나라는 테러와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2011년 대통령이 하야하고 과도정부가 국가의 기본 틀을 마련 중이다.
이런 가운데 세계에게 가장 위협적인 테러단체로 평가받는 알카에다와 그 연계 세력이 활동하고 있다. 북부 시아파 후티 반군과 남부의 분리주의 운동 세력은 정부와 대립 중이며 정부의 통제력은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다. 만연한 부정부패와 피폐한 공공서비스, 높은 실업률과 문맹률, 식량·수자원 부족은 주민들을 궁핍과 절망으로 몰고 간다.
한때는 아랍 문명의 발원지였고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시바왕국의 근거지이기도 했던 이 나라는 전체 인구의 99.9%가 무슬림인 예멘이다.
이 예멘에서 편지 한 구절 때문에 11년간 의술로 복음을 전했던 한국인이 있다. 외과의사 출신의 박준범(51) 선교사다. 현재 한국인터서브선교회 대표로 활동 중인 그는 선교사가 되기 전 한 통의 편지를 읽었다. 어느 선교사의 편지였다. 구절에는 ‘예멘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피로가 많은 나라’라고 쓰여 있었다. 이 한 줄에 안타까움이 사무쳐 올랐다. 즉시 달려가 육체적 피로를 의술로 채우고 싶었고, 영적 피로를 복음으로 풀어주고 싶었다.
간절한 그의 바람은 2001년 예멘에 도착하면서 이뤄졌다. 그는 비정부기구(NGO)인 글로벌케어의 예멘 지부장을 맡으면서 현지에 빈민 클리닉을 열었고 도시 빈민이 많은 곳에 병원을 세웠다. 예멘에 유독 많았던 구순열 환자를 위한 자선단체도 만들어 치료를 도왔다.
“병원에서 환자를 기다리기도 했지만 소외된 사람들을 직접 찾기도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무의촌이나 하층민 지역을 순회하며 진료했는데 그중 한 소녀를 잊지 못합니다. 폐렴에 걸린 13세 소녀였는데 항생제 처방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생명을 잃을 뻔했습니다. 소녀가 사는 집은 헝겊조각을 이어서 만든 누더기 같은 곳이었습니다.”
박 선교사는 심장병을 앓는 소녀를 한국에 데려와 수술을 받도록 한 일도 있었다. 그는 소녀의 진료 차트를 지니고 다녔는데 마침 한국으로 안식월을 나오면서 소녀의 진료 차트도 챙겼다. 그러다 전남 광주 시내를 지나다가 눈앞에 ‘심장병원’ 글자를 보고 무작정 원장실 문을 두드렸다.
“원장님 반응이 뜻밖이었어요. 자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자신이 중학교 때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왔다가 떠나는 길에 심장병 환자 한 명을 데리고 가더래요. 우리나라엔 의사나 병원도 없나. 자존심이 상해서 나중에 심장수술을 하는 외과의가 되겠다고 결심했대요.”
병원장은 박 선교사가 손에 쥔 진료 차트를 보자마자 “수술합니다. 언제 데려 오겠소?” 하고 물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소녀는 한국에 도착했고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칠 수 있었다.
공식 교회라고는 한 곳도 없는 예멘에서 현지 기독교인들과 함께 드렸던 예배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개종자들은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핍박과 고난을 불사하고 모였다. 만나는 것 자체가 감격이었다. 가정 주택이 예배당이 되고 신자들은 좁디좁은 방 안에 둘러앉아 찬송하며 눈물을 쏟았다. 선교의 진정한 축복은 예배라는 것을 알았다.
척박한 예멘을 향한 사랑
박 선교사는 준비된 사람이었다. 대학시절부터 선교사 훈련을 받았다. 1984년 당시 출석하던 광주 동명교회에는 OMF선교회 소속 영국인 제레미 선교사가 대학생 사역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제레미 선교사는 경건의 시간(QT)과 성경공부를 인도했는데 리더십이 있거나 선교 사명을 가진 청년들은 따로 집으로 불러 심화훈련을 시켰다. 일종의 선교사 훈련이었는데 8명의 청년 중 5명이 선교사가 됐다.
그는 89년 의대를 졸업하고 광주기독병원에서 근무하다 99년 8월 선교사 파송을 받았다. 이후 영국에서 선교 훈련을 받고 2001년 예멘행 비행기를 탔다. 대학시절부터 선교 마인드를 가졌던 그는 병원 근무 시절 시편(48:6∼9) 말씀을 묵상하면서 선교사가 되기를 결심했다. 그러다 선교편지에 언급된 예멘을 만난 것이다.
예멘은 2005년부터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인 알카에다의 본거지로 부상했다. 외국인을 표적으로 하는 테러까지 증가하면서 2006년부터 외국인의 여행이나 외출이 제한을 받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이 살 수 있는 환경도 각박해졌고 급기야 2007년 터진 ‘아프간 피랍’ 사건은 한국 선교사들의 안전문제에 빨간불이 켜지는 분수령이 됐다.
“2007년 이전까지 외국인의 지방 여행은 자유로웠습니다. 차로 이동해도 문제가 없었고 주말에는 소풍도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2007년 이후엔 여행은 엄두도 못 냈습니다. 현지에 거주하는 한국인 상당수가 선교사라는 사실도 알려졌습니다.”
예멘은 현재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이라크,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시리아와 함께 여행금지국가로 지정돼 있다. 하지만 박 선교사에겐 언제든 다시 가야 할 땅이다. 예멘 사랑은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예멘 국민의 99%는 순박하고 착한 사람입니다. 정이 많습니다. 특히 기독교로 개종한 크리스천들이 생각납니다. 그들은 지하교회에서 사회적 차별과 핍박을 감수한 채 언제 발각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인은 자신의 신앙을 차라리 공개하고 싶다고 밝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선교사는 가야 하고 선교는 계속돼야 합니다.”
한국에서도 선교는 계속된다
2012년 4월 귀국한 박 선교사는 곧바로 선교회 대표를 맡았다. 요즘엔 대표로서 활동할 뿐 아니라 국내 신학교와 교회, 단체 등을 누비며 전문인 선교의 중요성을 강의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대전 새로남교회에서 열렸던 의료선교대회에서는 총무로 활약하면서 ‘제2의 알렌 선교사’가 되자고 도전했다.
인터서브선교회는 1852년 인도의 학대받는 여성들을 위한 교육과 의료 사역으로 출발한 대표적 전문인 선교단체다. 소속 선교사들은 비즈니스맨을 비롯해 의사, 간호사, 교수, 교사, 컴퓨터 전문가 등 40여개의 직종에서 ‘일터 선교’를 실현하고 있다. 한국인터서브선교회는 1990년 12월 창립돼 현재 27개국에서 161명의 선교사들이 직업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있다.
박 선교사는 전문인 선교 개념은 재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전문인 선교가 지나치게 전문기술이나 지식 소유 여부에 국한돼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만약 전문인 선교사를 자격증 소지자로 제한한다면 선교는 소수자에 의한 특수 영역으로 전락할 것”이라며 “선교는 기독교인 전 세대에게 주어진 사명이기에 기술이나 자격증 소지 여부가 아니라 영적 자질과 헌신, 진정성이 우선시 돼야 한다”고 말했다.
선교 현장은 변화무쌍한 정글 같은 곳이다. 아무리 철저히 준비하고 떠난다 하더라도 현지 상황과 조우하다 보면 돌발 상황이 발생하고 좌충우돌하게 마련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진짜 선교사가 된다. 그는 설명을 이어나가다 이런 질문을 던졌다.
“아줌마가 전문인일까요, 아닐까요?” 기자가 머뭇거리자 박 선교사는 “제가 볼 때는 전문인 맞습니다” 했다. 이유는 이랬다. “아줌마를 안하무인이라며 놀리지만 사실은 돌파력과 추진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자질은 선교지에서 꼭 필요합니다. 전문직업을 가져야만 전문인 선교사일까요? 아니요. 지금은 아줌마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박 선교사에 따르면 세계 선교 현장에서 활약 중인 선교사는 특정한 기술이나 직업을 가진 전문인이 아니라 아줌마 같은 열정과 영성, 적극적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전문 분야와 기술은 그 다음 문제다. 그는 이를 선교 현장에서 절감했다.
예멘에 도착한 그는 당시 현지 종합병원에서 일하는 게 선교 활동의 전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상황은 시시각각 변했고 예상대로 선교가 척척 진행되는 것도 아니었다. 현지인 환자를 치료하는 게 우선인지, 복음을 전하는 게 우선인지 헷갈렸다. 예멘은 이슬람의 땅. 공식적인 복음전도 행위는 철저히 금지돼 있었다. 대부분의 전도는 사적 관계에서 이루어졌다. 이슬람이 절대적 우위인 사회에서 복음전도 방법은 배운 것과는 달랐다. 현장에서 부딪혀야 알 수 있는 지식도 많았다.
“무슬림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는 여성 환자는 여의사가, 남성 환자는 남의사가 진료하는 것으로 알았어요. 이슬람 사회가 남녀 구분이 명확한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산부인과를 제외하고는 남자 의사들의 진찰에 문화적 장벽은 없었습니다. 질병이라는 고통 앞에서 남녀 구분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젊은 세대의 경우는 더 개방적이었고요.”
선교는 일이 아니라 관계다
대학시절부터 선교 마인드로 무장하고 선교훈련을 거쳐 선교사가 됐지만 그에게 선교는 과정이며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실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영성 관리였다.
“2, 3년차 시절이 생각납니다. 바쁘게 활동은 하는데 신앙은 메말라 가더군요. 그러다보니 사람들과의 관계도 긴장이 높아졌고요.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일 중심의 활동이 선교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때 현지인들이 보이고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교훈은 현재 대표직을 수행하면서도 영성을 잃지 않는 힘이 되고 있다. 선교사는 철저히 관계 속에서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신념이 됐다.
타문화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의술로 육신의 고통을 치료했던 의사로서 그는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질병을 치유할 방안도 고민하고 있었다. 마침 선교계에서는 선교 현장의 다양한 경험을 한국교회의 소생을 위해 기여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박 선교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리고 교회 역시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지금 세대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세대라고 한탄만 하면 안 된다”며 “곡조를 잘 맞춰줘서 춤을 추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선교의 유익을 이렇게 정리했다. “선교 현장은 신앙이 더 깊어지는 장소입니다. 선교사의 가장 큰 축복은 후원을 많이 받아 현지에 교회당을 세우고 큼직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아닙니다. 묵상과 예배가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선교사는 타문화라는 텍스트를 살아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